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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리드스톤 Apr 07. 2024

글로벌 투자은행 직장인 이야기 : 총알받이

나는 늘 총알받이 척후병이었다.

내가 다니던 외국계 투자은행은 FICC를 통해 꾸준히 돈을 벌고 있었다. FICC는 복잡한 파생상품이 결합된 금융상품으로 일부 상품, 특히 미국 달러나 유로화로 된 파생상품은 외국계 투자은행 밖에는 상품을 만들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내가 있던 회사를 포함한 골드만삭스 같은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투자은행들은 일종의 과점 상태와 같은 경쟁 구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회사는 이미 FICC로 벌어들일 수 있는 수익보다 더 많은 수익을 목표로 하였다. 어느 회사나 그렇듯이 회사의 임원들은 앞으로 어떻게 성장하겠다는 계획을 회사에 제출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다. 회사는 2030년까지 매년 10% 이상 수익을 성장시키겠다는 목표를 만들었다. 문제는 늘 그렇듯 어떻게 How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애초부터 FICC 상품을 팔 수 없도록 채용되었다. 다른 외국계 투자은행 다니는 형님 내 상황삼성전자를 다니면서 스마트폰과 반도체를 팔 수 없는 상황으로 비유했다. 즉 나는 삼성전자를 다니지만 세탁기, 냉장고만 팔 수 있는 직원이었다. 애초부터 반도체나 스마트폰 같은 주력 상품을 파는 세일즈 직원과는 시작부터가 불리했다. 게다가 삼성전자에서 냉장고를 아무리 잘 팔아도 언제나 임원 자리는 반도체와 스마트폰 사업부에서 나오게 마련이다.


그럼 내가 왜 채용되었냐고?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외국인 Managing Director는 FICC만으로는 은행 내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은행에 높은 인사들은 대부분 투자은행의 전통적인 사업인 IB 부서 출신이었다. 한국에서는 FICC 사업이 돈이 되는 상황이었지만, 은행 전체적으로는 전통적인 IB 분야가 늘 대세를 이루었다. 당시 회사는 총 3명의 CEO가 있었는데 모두 IB 부서 - 기업인수, 사모사채 발행, 부동산 및 인프라 투자 등 전통적인 투자은행 분야 출신이었다. 2021년 내가 채용될 무렵 회사의 IB 부서는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인해 부동산 투자 분야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나의 외국인 Managing Director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IB 부서의 업무 중 일부를 자신의 영역으로 가져왔다. 하지만 평생을 FICC만 해본 사람에게 IB 업무는 생소한 업무이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일부 IB 업무 경력을 가진 직원을 자신의 밑으로 채용한 것이다.


외국계 투자 은행의 구조는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나라의 증권사와 은행 하나의 회사로 합쳐놓은 형태라 보면 된다. 즉 내가 속한 본부와 본부장(Managing Director)은 증권이고, 전통적인 투자은행(IB) 업무는 은행부 담당이다. 서로 일하는 스타일이나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도 다르고 상대하는 고객도 매우 다르다. 쉽게 말해 증권은 주식처럼 주문과 체결로 이루어진다. 거래 속도 매우 빠르고, 판매하는 상품도 무차별하다. 삼성전자 주식을 사는데 삼성증권에서 사는 것과 미래에셋증권에서 사는 것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과 동일하다. 반대로 기업인수, 인프라투자 같은 투자은행(IB) 업무는 매우 호흡도 길고, 판매하는 상품도 각 은행별로 매우 다르다. 나는 투자은행(IB)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이지만, 애초부터 증권에 소속되어 IB 업무를 전혀 모르는 본부장과 팀원들과 함께 일해야 하는 기형적인 구조로 업무를 시작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나는 좋게 말하면 "성장 동력"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돈 벌면 좋고 안 벌어도 그만"인 존재였다. 한국 지점의 수익은 대부분 FICC에서 나왔고, 내가 하는 판매하는 상품은 좋게 말하면 "혁신적인 상품"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미국이나 유럽에서 팔다가 안 팔려서 남은" 상품이었다. 한국 투자자들로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이거 미국이나 유럽에서 팔다가 안 팔려서 한국에다 가져온 거지?"라는 질문이 있다.

이제는 솔직히 말할 수 있다.

"맞다. 팔다가 안 팔려서 남은 거 한국에서 파는 거다."


나도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한국 투자자를 위해 내부 은행부 직원들과 싸워서라도 좋은 딜을 가져오겠다고 노력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저녁시간에는 런던으로, 밤 시간에서는 뉴욕으로 좋은 상품을 가지고 있는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으로 좋은 상품을 보내달라고 어필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노력은 내부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증권부와 은행부 간에는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있었고, 증권부 소속인 내가 은행부 사람들한테 협조를 얻는 일은 극히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은행부 사람들은 내가 왜 이런 IB 업무를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 하겠다는 반응이었다.) 게다가 런던지점에 방문했을 때 유럽 투자은행(IB) 부문 총괄한테 들은 한마디는 나의 노력을 좌절하게 만들었다.


"Deals are scarce resources"

즉 좋은 상품은 어느 누구나 팔고 싶 때문에 아무한테나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네가 속한 한국에는 주지 않다는 뜻으로 나는 이해했다.


회사는 한국 지점을 신상품을 테스트하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쉽게 말하면 반쯤 만든 상품을 한국 투자자들에게 던져보고 반응을 살핀 뒤 팔리겠다 싶으면 그때 나머지를 만드는 식이었다. 아마도 자신들이 속한 미국 이나 유럽 투자자들에게 이런 짓을 했다가는 관계가 끊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만만한 한국이나 대만 같은 지역에 이런 상품을 던져보는 것으로 추측된다. 어찌 됐건 세일즈인 내 입장에서는 위에서 시킨 일을 안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상품들은 고객에게 소개해보고 고객이 주는 피드백을 위에다 보고하는 일을 많이 했다. 누가 봐도 반쯤 만들다만 상품이거나, 특이한 상품이었기 때문에 나는 고객에게 설명할 때,

"회사에 아주 중요한 전략 상품이기 때문에 상품 개발 초기에서부터 고객님한테 소개드리고, 고객님의 피드백을 적극 반영하여 상품을 만들 계획입니다."라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댔다.


하지만 누가 봐도 팔기 어려운 상품이었다. 어떤 때는 펀드 매니저가 없는 펀드를 팔아야 할 때도 있었다. (예를 들어 주식형 펀드인데, 아직 펀드 운용사가 정해지지 않다는 뜻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사실 나도 모르겠다.) 쉽게 말하면 된장 소스로 만든 스파게티나, 크림소스 넣은 된장찌개 같은 음식을 팔라는 것과 똑같은 거다. 혹은 크림빵인데 일단 크림이 없는 상태로 사시면 나중에 크림을 넣어서 주겠다는 거다. 나는 대략 맞춤형 크림빵 정도로 고객들한테 설명했다. 그러나 한국 투자자들은 상당히 똑똑하다. 내가 아무리 있는 말, 없는 말로 포장을 해봤자 빵에 크림이 없다는 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아무도 이런 상품을 사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상품을 사고 싶다는 고객을 우연치 않게 데리고 온다고 한든 애초부터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상품들이었다.

 

어느 날 1차 대전 때 참호전을 그린 영화 "포비든 그라운드"를 본 적이 있다. 영국군 참호 안에는 수 만 명의 젊은 영군 병사들이 소총을 들고 초초하게 장교의 명령을 기다린다. 영국군 참호에서 불과 수 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수 백만명의 독일군 병사들이 참호 안에서 기관총과 박격포로 무장한 채 영국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젊은 영국군 병사들은 이 참호를 나가는 순간 총알받이 신세가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하지만 오직 본부의 명령만을 생각하는 무능한 영국군 장교는 수 백만명의 영국 젊은이들에게 돌격명령을 내린다. 그렇게 그들은 이름 모를 들판에서 총알받이가 된다.


그 당시 나의 상황도 이와 똑같았다. 나의 보스인 외국인 Managing Director는 본사의 전화를 받았고, 나에게는 명령이 떨어진다.

"돌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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