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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괜찮아 Mar 24. 2024

1991년 3월(2)

첫아이의 출산과 남편의 부재

그녀가 첫 아이를 출산할 때  남편은 옆에 없었다.  그는 새 학기 개학에 맞추어 전년도 8월에 이미 미국으로 출국을 하였기 때문이다. 결혼 4년 만에 갖은 첫 아이였다.  원래 출산 예정일이 8월 말이었지만, 아이는 엄마 속에 있는 것이 편한지 나올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았다. 9월 초에 유도 분만으로 아이를 낳기로 했다. 그녀의 친정어머니는 아프셔서 그녀의 산후조리를 봐주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어머님이 시골에서 올라오셔서 산후 간호를 해주시기로 하셨다. 모든 사람들이 남편 없이 애를 낳는 것, 친정엄마가 못 오시는 것에 대해 걱정을 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혼자 자취해 온 사람이야. 걱정 마셔"하고 자주 말하다 보니 그녀 스스로도 그렇게 믿었다.  


서울 북쪽에 있는 대학교 부속의 종합병원이었다. 한국의 베이비 부머 세대였던 그녀가 결혼과 출산을 경험할 때는 산부인과가 성황이던 시절이다.  출산예정의 예닐곱 명의 임산부들이 쭉 누워있었다.  나란히 누워서 통증을 참으며  아기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간호사들은 고통을 호소하는 산모들에게 오히려 조용히 하라고 하기도 하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비인간적이었다. 때가 된 산모들은 한 명씩 출산실에 들어가 아기를 낳았다. 마치 대리모처럼. 유도 분만이기 때문에 그녀는 멀쩡하게 병원에 가서 입원하였다. 약을 주입하면서 통증의 강도가 커지는 것을 실감하며 다른 산모들과 함께 고통의 신음을 공유하였다


거의 밤 11시가 넘었다. 아이는 11시 58분에 세상에 나왔다.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듣고 그녀는 그냥 잠이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니, 미역국을 병원에서 주었다. 맛있었다. 딸이라고 하였다. 임신 시 아이의 성별을 알 수 도 있었지만 그녀는 시도하지 않았다. 그가 5대 종손이라 주변에서 아들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아들선호사상에 치를 떨면서도, 어느새 첫 애가 아들이라면 자신의 마음이 편할 것이라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결국 첫딸의 출산에 대해 축하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친정식구들도 '고생했다'라는 말로 대신했다.  '첫째 딸은 살림 밑천이래'까지는 괜찮았다 '둘째 또 낳으면 되지'란 말도 서슴없이 나왔다. 별로 말이 없으신 시어머님은 결국 '옆 침대 산모는 아들 낳았다고 꽤 좋아하더라'하며  결국 섭섭한 맘을 감추지 못하셨다. 그래도 못 오시는 친정어머니 보다 그녀의 손을 잡고 미역국을 먹여주시는 시어머님이 더 의지가 되었다. 


퇴원 후, 시어머님은 며칠 간호를 해주시고 시골에 농사가 바빠서 내려가셨다.  혼자서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고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한 그녀는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하여는 이미 책을 읽어서 어느 정도 무리 없이 할 수 있으리라 스스로 기대하였다. 어른들이 늘 하시는 말씀 '아이들은 낳기만 하면 그냥 알아서 자란다'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하지만 아이와 단 둘이 지내는 것은 정말 외로움 그 자체였다. 아이는 끊임없이 울었다. 낮에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시지만 저녁에는 아이와 단 둘이 있게 되었다. 아이가 울면 기저귀도 갈아보고, 우유도 주고 하지만 아이는 울어댔다. 말이 통하지 않는 대상과 하루종일을 같이 보내고 그 책임이 온전히 그녀에게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그녀도 그냥 서러움에 울어버렸다. 그녀의 주변에 그를 위로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직 복직하려면 한 달이나 남았지만,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시댁이 있는 시골로 내려갔다. 아픈 엄마로 인해 친정은 갈 수가 없고, 시댁은 부담스러웠지만, 외로움이 더 사무쳤다. 한 달 아이와 보내고 그녀는 복직을 하였다.  주중에는 서울에서 주말에는 시골에 가서 아이를 보고 올라왔다. 사실 추운 겨울에는 내려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녀의 동료들은  아이가 보고 싶어서 일 끝나기만을 기다린다고 하던데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가능하면 혼자 있고 싶었다. 자신이 부모로서 자격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자격지심이 그녀를 짓눌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여러 가지 단어로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이었다. 산후 우울증 아니면 그냥 우울증. 남편 없이 애를 낳고, 키우는데... 정상이면 이상한 것 아닌가? 그녀가 원더우먼도 아닌 다음에. 하지만 당시에는 그녀는 자신만을 탓하면 힘든 하루를 보내며 살았다. 


그는 아이의 탄생에 대해 매우 기뻐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와 그녀가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육아 일기를 쓰는 부모, 아이의 웃음에 모든 것을 얻은 듯이 행복해하는 부모의 모습에 대한 기대감과 행복을 세세히 적어 보냈다.  그녀는 그의 편지를 읽으며 '네가 한 번 키워봐라'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를 악 물고 답서를 보냈다. 아이가 예쁘다고. 그리고 두세 번의 편지가 오간 후에, 그녀는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깜짝 놀라서 그가 걱정으로 가득 찬 편지를 보냈고, 여러 번 오간 편지는 그녀도 그도 늘 세 식구 빨리 만날 날을 기다린다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1991년 3월 드디어 세 식구가 낯선 이국땅에서 같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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