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명확하게는 생각나지 않는다. 누구나 그러하듯 인간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기 나름이니. 분명한 것은, 최소한 초등학생 시절에는 나도 이렇게까지 불안정적이고 어두운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적당히 밝고, 적당히 웃으며 적당히 공부하는 아이였다.
한 살 터울의 언니는 학교를 일찍 들어갔지만 모든 걸 처음으로 겪어보았고, 늦둥이로 태어난 동생은 아직 옹알이조차 할 줄 모르는 아기라서 부모님이 늘 곁에 붙어있었다. 어린아이들을 좋아하던 언니도 자주 동생에게 붙어있던 것이 기억에 남아있다. 가장 어정쩡한 둘째였던 나는, 내게 주어진 관심을 부족하게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5살이었던가, 자다가 잠시 깼던 나에게 누군가 뽀뽀를 해준 적이 있다. 나는 당연하게 그 사람이 어머니일 거라 생각했지만, 기습뽀뽀범(?)은 언니였다. 그 정도로 우리는 사이가 좋았다. 자신보다 어린, 아이와 아기를 너무나 좋아하는 우리 언니. 그 사랑이 겨우 십몇 개월밖에 차이 나지 않는 동생인 나에게까지 닿았던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우리의 사이는 조금씩 어긋났다.
가정시간에 '형제는 라이벌과 같은 관계'라는 뉘앙스의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정말 라이벌이라도 된 것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투닥거렸다. 아버지를 닮아 잘 타는 까무잡잡한 피부, 언니와는 달리 통통한 편이었던 체형은 가장 많이 공격당해 나는 그러한 것들을 하나의 콤플렉스로 여겼다. 그래도 이런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을 때, 동생이 생겼다. 당연하게 부모님과 언니의 관심이 그쪽에 더 쏠릴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지만 괜히 얄미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마냥 사랑스럽긴 했나 보다. 훗날 듣기로 집에 오면 아닌 척 계속 동생 옆에 붙어있었단다, 내가. 그런 걸 보면 그때도 이런 아이는 아니었을 텐데.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 집에 와서는 손을 씻고 숙제부터 하는 아이. 숙제가 끝나면 혼자 책을 읽거나 조용히 TV를 보는 아이. 가끔은 학급 임원을 하기도 하고,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방에서 조용히 보냈다. 약은(?)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언니가 혼나고 있으면 혼자 조용히 방을 치우기도 하던. 책과 글, 그 모든 것이 있는 이야기를 사랑했던 나.
나는 중학생이 되고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며 조금씩 변화했다.
혼자 조용히 보던 애니메이션을 같이 보는 친구가 생겼다.
취미로 끄적이던 그림을 같이 그리는 친구가 생겼다.
가끔씩 떠오르는 대로 휘갈기던 글을 읽어주는 친구가 생겼다.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하는 일상은 새로운 것 투성이었고, 친구가 많지는 않아도 나름 괜찮은 교우관계를 맺으며 웃고 지냈다. 낯설었던 교복을 벗을 시기가 다가올 때쯤, 그 쯤부터 나는 '그런 아이'가 되었던 것 같다.
중학교 3학년. 흔히 중2병이라고들 일컬어지는 시기가 지나고 고등학교 진학을 문제로 고민이 많아졌을 시기에 나는 한 친구로부터 지쳐가고 있었다. 그 아이는 집착이 강했고, 친구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했다. 나를 포함한 친구에게서 관심을 이끌어내고자 했으나, 친화력이 좋은 성향은 아니었기에 그 수가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관심을 모으는 방법이 별났고, 어찌 보면 흔하다고 생각되지만, 잔인했다.
나는 피를 싫어했다. 그 아이는 시도하고 남-았다고 한-은 흔적을 밴드로 덮어놓고 내게 내밀었다.
" 나 아파. 힘들어. "
" 이거 내가 그랬어. "
아직까지도 그 아이가 진짜로 상처를 낸 것인지, 밴드로 덮어놓고 거짓말을 한 것인지는 모른다. 나는 피를 싫어했으니까, 밴드로 가려진 피부에 자리했을 붉은 흔적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마도 가을이었던 15살의 어느 날, 그 아이가 처음으로 이야기하며 보였던 손목의 밴드는 내 눈을 가리는 안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