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량밍 May 09. 2023

어쩌면, 그래서 사랑을 모르나 봐

나 사랑하기, 2


  그래. 싫었다. 그 아이가 스스로를 해하겠다는 말과 애매하게 흘리는 말로 나를 휘두르려 한 것과 막무가내로 자신의 의지를 따라주기를 바랐던 것, 일호들이 그 아이에게 관심주기를 요구한 것도.

  싫었는데도 쉽게 인연을 끊어낼 수는 없었다. 해본 적이 없으니까.


  "네가 싫어."


  그 한마디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랐고, 그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몰랐다. 어쩌면 사람을 상처 줄 수 있는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걸 은연중에 깨닫고 있어서였을지도. 그 아이는 '배고파'라는 말처럼 가볍게 끝을 말했다. 내가 뱉은 말 한마디가 혹시라도 그 아이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면 나는 그 책임을 져야 했다. 물론 그때는 그런 거보다는 '친구니까'라는 생각이 강해서였던 것 같지만.



  15살 때의 관계는 괜찮았다. 피해 입었다고 말할 일은 없었으니까.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는 일호들이 궁금하긴 했지만 그것이 나를 힘들게 하지도 않았다. 균열이 생기기 전까지는 정말 괜찮았다.






  16살이 된 나는 8명의 친구들과 동아리를 만들게 되었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동아리는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우리는 글과 그림을 좋아하는 친구들끼리 모여 만화창작 동아리를 만들었다. 자세한 계획과 명단을 작성해 당시 3학년을 담당하시던 선생님들께 보여드리고 매주 두세 번 정도 점심시관과 방과 후의 미술실 사용을 허락받았다.


  우리는 스토리 담당과 작화 담당으로 나뉘어 두 명씩 짝을 맞춰 총 네 개의 만화를 그리기로 했다.

  글을 조금 더 선호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그림을 더 선호하는 친구들이 있어 담당을 나누는 것은 생각보다 빨랐다. 물론 선호도로만 나누지는 않았고, 우리끼리 테스트를 보긴 했다. 글을 선호하는 친구는 1000자 이내의 간략한 이야기를, 그림을 선호하는 친구는 전신 그림 두 장 정도 준비해 오기로 했던 것 같다. 나는 그림도 자주 그리는 편이었지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 더 강해 판타지 장르의 글을 구상했었다. 각각 들고 온 테스트용 글과 그림을 보고 원하는 친구끼리 짝을 나누었는데, 문제는 그 아이였다.


  글은 안 써.

  그림은 못 그려.

  우리는 결과물 퀄리티에 대한 욕심이 강했다. 나도 글을 잘 쓴다거나 창의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 아이는 우리가 정한 최소한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둘 씩 나누기에 9명은 애매해서 그 아이를 빼야 하나,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다 같이하려고 했다. 모두가 그림을 다시 그려보라고 했고, 뭐든 좋으니 글을 써보라고 했다. 글은 못 쓰겠다고 포기를 해버려서 다른 친구가 그림 연습을 시켰는데, 결국 그 친구들만 세 명이 짝을 맺기로 했다. 조금 더 연습하고 스토리든, 그림이든 해보라고 하고.


  그림은 나아지지 않았고, 글도 여전히 쓰지 않았다. 얘는 진짜 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걸까, 생각하던 때였다.






  여느 때와 같은 날, 친구들은 여전히 글과 그림을 좋아해 함께 취미를 나누었다. 그러다 다른 사람들과 글이나 그림을 공유하고 함께 연습하는 단체방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방에 가입하기 위한 조건 중에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기존에 있는 캐릭터 혹은, 본인이 설정한 성격의 캐릭터에 대해 300자 이내로 지문 등을 써서 내는 것이 있었다. 같이 시도한 친구와 함께 활동하는 사이, 그 아이도 가입을 원했다. 스스로 하기를 어려워해서 나와 다른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살짝 도와주었다. 함께 다듬어준 내용으로 가입에 성공한 것을 분명 함께 보았는데,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그 아이의 언행에 불쾌함을 느낀 인원이 많아 전체 공지가 올라왔다. 우리가 지인임을 아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결과적으로 우리에게까지 제재가 생겼다.


" 나 아니야. "


  진짜 뭔 -소리야. 황당함에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 아이의 계정으로 우리가 직접 신청하고 결과를 확인했기 때문에 설정한 닉네임도, 프로필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작정 자기가 아니라니? 그 아이의 언행에 불쾌를 느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는데, 앞뒤 다 자르고 그냥 아니라니??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 아이를 다그쳤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너무했나 싶지만, 그 당시 우리도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 그리고 이어진 말은 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 그 계정, 칠호가 가지고 있어. "


  칠호는 아이돌 연습생이라고 그랬는데, 갑자기? 연습하느라 연락할 시간도 없다는 애가, 갑자기, 걔가 뭘 하는지 알고? 그 아이의 말에 따르면 가입을 도와준 그날부터 그 계정을 칠호가 가져가서 썼다고. 그 말이 어디 쉽게 믿어지는 말인가? 몇 시간 만에 계정을 넘겨주고, 칠호가 연습시간까지 쪼개가면서 -솔직히 아이돌 연습생이라는 것도 그다지 믿기지 않았지만- 활동했다고. 거짓말을 할 거면 좀 성의 있게 하던가. 우리도 불퉁한 대답을 던지고 삐뚤게 반응했다. 결국 그날은 싸움으로 대화가 끝날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끝을 말하는 그 아이에게 질렸던가.

  어째서 사고가 '둘 줄 한 명이 사라져야 끝난다'로 이어질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던 걸까. 스물셋의 지금도 여전히 그 아이를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그 아이가 원한 건 뭐였을까.



  그날, 칠호에게 연락이 왔다. 자기가 그런 거 맞다고. 솔직히 어쩌라는 걸까, 싶었다. 고작 친구들끼리 다툼인데. 타 지역에 있는 친구에게까지 연락이 올 일이었을까. 단 한 번도 알려준 적 없는 전화번호로 문자가 와서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나는 문자를 보낸 사람이 칠호 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일호들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었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이상하잖아,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