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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절은 여름 Jun 13. 2023

2. 멜론, 이 순간

멜론을 사랑하게 됐다

멜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 중 하나다. 잘 익은 멜론은 너무 딱딱하지도, 너무 물렁하지도 않은 식감을 가졌다. 나는 온화한 그 식감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딱딱하지도, 물렁하지도 않은 적당한 부드러움. 갑작스러운 법이 없어 약한 치아도 놀라게 하지 않는다. 말캉한 과육을 콱 씹으면 과즙에서 흐르는 은은한 향과 함께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진다. 이 순간의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멜론이 좋은 이유는 맛에만 있는 게 아니다. 멜론에는 내 청춘의 추억도 하얗게 얽혀 있다. 나는 몇 해 전, 한국을 떠나 1년여간 프랑스에서 생활해 보는 모험을 감행했었다.​


나는 프랑스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 전까지 그 흔한 유럽 여행 한번 해본 적이 없었다. 외국이라곤 가까운 일본에 가본 게 전부였다. (프랑스로 떠나게 된 계기나 당시의 구구절절한 생각이야 물론 있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풀도록 하자…….) 지금보다 더 마르고 잔병치레가 많았던 그때는 내가 파리에 무사히 도착한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프랑스 생활을 시작하며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것도 건강이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즐기자, 이게 당시 내 간절한 바람이자 과제였다. 특히 그때 내가 신경 쓴 건 미주신경성 실신을 예방하는 것이었다.

미주신경성 실신은 여성들한테 주로 일어난다. 나는 중학생 때 만원 버스에서 처음 겪었다. 증상은 의식이 흐려지면서 눈과 귀가 멀어가고, 정신이 내 몸과 유리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겪는 것이다. 복통과 식은땀이 동반돼 전조를 느낄 수 있지만 그전까진 언제 증상이 올지 예측이 안 되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불안이 오면서 큰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프랑스에서 증상이 오고 쓰러지면 말도 안 통하고 큰일이 될 것 같아 걱정이었다. 그래서 예방책이자 치유책으로 챙긴 것이 간식 도시락이었다. 간식 도시락 안에는 마들렌이나 뺑 오 쇼콜라, 본 마망 쿠키, 또는 과일 등을 넣었다. 당을 충전해 주거나 바람을 쐬면서 충분한 휴식을 가지면 증상이 가라앉기 때문이다.

날이 점점 뜨거워져 숨이 가쁜 날이 잦아지던 시기에 오셩이라는 동네 마트에서 싸게 파는 멜론을 하나 샀다. 멜론을 잘게 썰어 도시락을 준비하고 어학원에 가던 날이었다. 버스를 탔는데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조금의 빈틈도 없이 가득 들어찼다. 버스에는 에어컨이 없었고, 창문도 조금밖에 열리지 않아 환기가 되지 않았다. 열기가 가득 찼다. 숨이 가빠 왔고 순식간에 식은땀이 올라왔다. 시야에 여러 개의 작은 빨갛고 노란빛들이 수면 위 파동처럼 퍼져가며 깜빡거렸다. 전조증상이다. 내려야 한다. 급하게 내리자마자 그늘 아래 가까운 벤치에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 시야가 까매지진 않았지만 심장이 거세게 뛰었고 머리가 띵했다. 급격한 갈증이 느껴졌다.

아, 멜론이 있지!

멜론 조각을 입안에 넣자마자 과즙이 목구멍을 적셨다. 달달한 부드러움이 손끝 발끝까지 뻗어나갔다. 해갈과 함께 심장도 가라앉았다. 시원한 바람이 손을 뻗어와 땀을 거둬가 주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나는 금세 회복된 채로 눈을 감고 바람의 손길을 그대로 느꼈다. 머리칼을 넘기며 안도했다.​


다음날에도 멜론 도시락을 챙겼다. 그리고 또 그다음 날에도. 파리의 해가 점점 길어지다가 다시 짧아질 무렵까지, 계절 내내 멜론 도시락을 들고 다녔다. 길을 걷다가 조금이라도 지치면 벤치에서, 공원 그늘에서, 분수 앞에서, 센 강변에서 멜론을 꺼내 먹었다. 파리에선 카페나 식당에 들어가지 않아도 앉을 곳을 금방 찾을 수 있었고, 한국에서처럼 어딜 갈 때마다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다. 원할 때마다 바람을 쐬고 편안하게 늘어지며 달콤한 멜론을 먹었다. 살이 금방 올랐다.​


한창 멜론에 중독되어 있던 어느 날, 프랑스인 친구 TT의 집으로 식사 초대를 받았다. 나는 애피타이저로 나온 멜론을 혼자 반 통을 넘게 먹어 TT를 놀라게 했다. TT는 나의 멜론 사랑을 신기해했다. 그렇게 맛있냐. 응, 그렇게 맛있다. 그리고 나는 멜론을 먹다 보면 온몸에 평온이 스며드는 기분이라고, 먹는 이 순간을 사랑하게 된다고 했다. 멜론을 먹을 때의 마음. 나를 위해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멜론을 준비해 주는 마음. 나는 그때 오직 그 마음들로 나를 온전히 지켜냈고, 프랑스에서의 시간을 껴안을 수 있었다.

돌아보니 지금의 내가 그리워하는 그 시절에서 멜론 향이 난다. 연둣빛으로 물들었던 파리의 여름. 그때보다 더 맛있는 멜론이 있을 수 있을까. 현실은 그만큼 강력한 추억 보정을 이길 수 없기 마련인데.

그러나 놀랍게도 지난주에 먹은 멜론에서 그때만큼 사르르 몸을 휘감는 다정한 맛을 느꼈다.

지난주에 자취방으로 택배가 하나 온 것인데, 혹여나 상할까 뽁뽁이로 어찌나 이리저리 꽁꽁 싸맸던지 뜯기도 힘들었다. 그만큼 단단한 마음을 멜론에 실어 보낸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에게 잘 받았다고 감사 전화를 드렸다.​


“네가 멜론 좋아하잖아.”

“고마워. 잘 먹을게.”

“애인이랑 나눠먹어.”​


멜론을 애인과 나눠먹기 위해 주말까지 안 먹고 기다렸다. 애인은 나 혼자 먹으라고 만류하더니 내가 같이 먹자고 조르자 곧 능숙하게 멜론을 쪼개기 시작했다. 내가 옆에 서서 파리에서 먹었던 멜론을 예찬하는 동안 애인은 멜론을 세로로 길게 사등분하고, 껍질을 따라 칼집을 넣은 뒤 네모나게 잘라 접시에 담아주었다. 다디단 멜론 향이 집안에 퍼졌다. 애인이 몰캉몰캉 잘 먹는 걸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진짜 맛있다며 눈을 크게 뜨고 웃는 너. 나한테 더 많이 먹으라며 접시를 내 쪽으로 미는 너.

같이 먹길 잘했지.

정말이지.

달다.

평온하다.

그렇지.

역시.

멜론을 먹는 이 순간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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