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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수 Sep 20. 2024

남편의 케렌시아, 태화강

  고요하게 흐르는 강물에 나룻배 한 척, 그 뱃머리에 대금을 부는 여인의 머리칼이 잔잔하게 날린다. 멀리 강기슭 대숲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리자 백로, 왜가리 등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르는데, 그때 누군가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하늘 높이 날아올라 부채를 ‘촤락’ 펼치며 대나무 꼭대기에 외발로 섰다. 

 태화강 대숲을 지날 때면 가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곤 한다. 오빠들의 영향으로 무협 영화를 많이 보며 자란 탓이다.

  태화강은 남편의 오랜 케렌시아 장소다. 새벽 다섯 시, 남편은 조용히 눈을 뜬다. 내가 깨지 않도록 주섬주섬 운동할 채비를 하고 동트지 않은 강변으로 향한다. 남편이 결혼 후 쭉 해온 루틴이자 그의 힐링 시간이다. 남편은 강변을 뛰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하면 하루가 보람차다고 한다. 그런 충만한 하루를 함께하자고 내게 매번 말하곤 한다.

  새벽 다섯 시 기상은 꽤 버거운 일이다. 새벽에 일어나는 일은 해외여행 비행시간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몸을 일으킬 때처럼 부담스러운 일정이다. 지키지 못할 약속 같아서 매번 말끝을 흐린다. 남편은 그럴 때마다 이른 새벽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자연의 평온함에 대해 예찬한다. 깨끗하고 맑은 공기가 강물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정경과 풀잎에 맺힌 이슬을 보고 와서는 멋진 태화강의 아름다움을 함께 보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한다.

  몇 해 전, 코로나 팬데믹으로 외출이 어려웠을 때는 태화강이 남편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유일한 공간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이 보이지 않자 아이들이 원격수업으로 활동량이 적어져 살도 찌고 건강이 걱정될 무렵이었다. 남편은 새벽에 가면 사람들과 마주칠 일도 없고 건강도 지킬 수 있으니 더없이 좋을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솔깃했다. 아침부터 등교할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니 잘되었다 싶었다. 

  첫날에 울리는 알람 소리가 그렇게나 짜증스러울 수가 없었다. 눈이 떠지지 않아서 감은 건지 뜬 건지도 모른 채 손을 더듬으며 아이들을 깨우러 갔다. 다행히 아이들은 깨우자마자 눈을 번쩍 뜨고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나도 겨우 정신을 찰인 후 세수만 간단히 하고 마스크를 썼다. 드디어 남편의 케렌시아를 향해 첫 걸음을 내디뎠다. 

  집에서 태화강까지는 가까운 거리라 몇몇 건물을 지나면 강 하구가 바로 보였다. 태화강의 새벽을 마주한 순간, 남편에게 백날 들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광경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사람의 입김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듯 한 바람은 맑고 시원했다. 태화강의 새벽은 낮과는 다르게 아주 싱그러웠다. 

  여름 새벽, 강가에는 핑크빛 청순한 바늘꽃이 무리 지어 피어있었다. 마치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는 소녀들 같았다. 그 옆에는 보라색 도라지꽃이 소담스레 물결을 이루었다. 외할머니를 닮은 꽃이었다. 유년 시절을 함께한 동무들과 가슴 한 켠에 묻어둔 외할머니가 여름 강가에서 두런거리는 듯했다. 그러다가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꽃으로 모습을 감춘 것 같았다.

  어릴 때 여름 방학이 되면 시골 외할머니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외할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 여물을 베어오거나 소를 몰고 나가서 풀을 먹였다. 그러면 언니와 나도 덩달아 일어나 어른들이 일하는 동안 꽃도 보고 벌레도 잡았다. 그때 가장 많이 보았던 꽃이 보라색 도라지꽃이었다. 보라색 꽃이 신비로워 피지 않은 꽃봉오리를 손으로 ‘톡’ 하고 터뜨렸다. 터지는 손맛이 짜릿해서 참 많이도 터트리고 다녔다. 돌이켜보면 동심을 가장한 무지함으로 자연에게 작은 인간이 저지른 잔인한 행동이었다. 

 딸아이에게 어릴 적 나의 추억을 들려주니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눈을 반짝거렸다. 아들은 오두막에 홀로 앉아 책을 읽겠다고 했다. 세월아 네월아 걷는 나와 딸의 걸음을 맞추고 있던 남편은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각자 자기만의 시간을 즐기다가 오두막에서 만나자고 했더니 족쇄를 푼 새가 날아가듯 뛰어가 버렸다. 그렇게 아들은 책과 음악을 들으며, 나와 딸은 꽃향기에 흠뻑 취하며 남편의 케렌시아에 스며들었다.

  우리 가족이 함께한 태화강의 새벽은 유년 시절의 기억 못지않은 값진 추억을 남겨주었다. 올해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남편의 케렌시아에 ‘풍덩’ 빠져 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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