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길동 소닉 해병대에 입대하다.(훈련소입소)
2002년 한일 월드컵이 4강이라는 기적 같은 성적으로
마무리를 할 때 드디어 나에게 군대영장이 날아왔다.
우리나라 남자라면 누구나 가야 하는 군대영장..
나의 아버지께서는 월남전 파병까지 다녀오신 해병대 용사이시다. 어릴 때부터 해병대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나는 군대는 무조건 해병대를 가야 하는 줄 알았을 정도로
해병대 정신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육군 입대영장을 취소하고 나는 해병대를 지원해서 면접과 체력검사를 통과하고 해병대 입대 합격과 함께
입영 영장이 날아온 것이다.
해병대 훈련소는 포항 한 곳 밖에 없기에 같은 기수인원은
모두 포항 훈련소로 집결을 해야 했다.
그때 당시는 kTX가 없던 시기여서 영등포역에서 새마을호를 타고 포항으로 향했다. 난생처음으로 군입대로 포항이라는 땅을 가본 그 느낌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철강의 도시답게 포항제철공장이 제일 눈에 띄었다. 그리고 훈련소 앞은 현역병등과 입대를 하기 위해 온 같은 기수
동기들, 그리고 가족들로 붐볐다.
이제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훈련소로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 훈련교관들은 상냥한 말투로 가족들과 배웅의 인사를 하게 한 후 훈련소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갑자기 돌변하였다. 아직 사회에 젖어있는 우리에게 군대용어와 규율 그리고 교관들의 모습은 적응하기 정말 힘들었다.
훈련소의 첫날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따뜻한 이불이 아닌 쾌쾌한 냄새의 모포와 매트리스 그리고 한 소대에 50명이 넘는 인원이 한 곳에서 잠을 자니 정말 탱크가 지나가는
소리에 잠을 거의 날을 세다시피 하였다.
식사도 사회에서 먹던 맛 하고는 전혀 다른 적응하기 힘든 맛이라 며칠은 적응하느라 혼났다. 그러나 훈련이 힘들면 힘들수록 이젠 밥은 없어서 못 먹을 정도로 식사 시간만 기다려지기도 했다.
6주간의 훈련 기간은 정말 잊지 못할 추억의 시간이 되었다.
사회인의 모습을 벗어나 이젠 대한민국 해병 대원으로 변하게 되었다. 힘든 시간을 함께 해서 그런지 함께 동고동락
했던 동기들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조선팔도에서 온 귀한 아들들이 한 곳에서 함께 훈련받고
고생하고 서로 위로하며 견디었던 그 시간들이 나에겐 정말 귀중한 시간이 되었다.
특히 사회에서는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기만 했던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면 군대에 와서는 부모님의 품이 가장 그립고 은혜였음을 느끼게 되었다.
사실 나는 하나밖에 없는 누나가 있는데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아 입대할 때 얘기를 하지 않고 입대를 했다.
그런데 군대에서 훈련을 받고 점점 철이 들어서 그런지
누나에게 편지를 써서 그동안 미안한 마음을 적어서 보냈다.
일주일 후 누나에게 답장이 왔다.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에서
누나의 편지를 읽고 펑펑 울던 기억이 난다.
이제 6주간의 훈련시간이 흘러 빨간 명찰을 가슴에 새기며
수료식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젠 동기들과도 헤어져야 한다.
나는 자대배치를 포항으로 배치받아 바로 자대로 이동 예정이었고 다른 동기들은 김포, 백령도, 연평도등 배치받은
자대로 떠나게 되었다.
군대라는 곳에 처음 와서 6주 동안 정말 많은 것을 얻었다.
배고픔, 낮잠, 휴식, 공부, 부모님 등등 모든 것이 감사함인데
그걸 잊고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이젠 내가 배치받은 자대를 가야 한다.
자대에 가면 이제 정말 군생활이 시작된다.
이등병으로 선임들을 만나고 수없는 훈련시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벌써부터 긴장이 된다.
마지막으로 나를 강한 해병으로 만들어 준 신병교육1대대
DI교관님들에게 감사하며 앞으로 보지 않게 되겠지만
교관님들과 함께한 6주간의 시간은 잊지 못할 것이다.
신병1대대 교관님들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