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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f David Feb 01. 2024

인생 2막을 시작하다.

전역 후 드디어 사회에 나오다.

드디어 대한민국 사회의 일원으로 전역을 명 받고 사회에  

나왔다. 멀게만 느껴졌던 2년여의 시간을 군대에서 보내고 나온 사회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나니 KTX고속열차가 개통되어 운영되고 있었고, 핸드폰도 많이 진화를 하여 크기가 작고 컬러 핸드폰이 보편화되어 있었으며, CD플레이어는 점점 없어지고

MP3라는 기기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전역 후 아직 군기가 바싹 들어 있어서 그런지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은 아직도 잘 지키고 있다.그리고 자기 관리를 위해 수영, 헬스, 영어공부등 자기계발에 시간을 많이 썼다.

특히 운동으로 산에 많이 올랐던 기억이 난다. 관악산, 계양산등 집에서 가까운 산은 정상까지 1시간 안에 오를 만큼

체력이 좋았다.그렇게 조금씩 시간을 보내면서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준비하며 점점 사회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전역 후 계획한 유학을 준비하면서 영어학원을 다니며 어학 공부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다행히 미국에 친척분께서

일식집을 크게 운영하고 있었기에 친척집에 거주하며 틈틈이 그 가게에서 알바를 하며 학비를 마련하기로 해서 난생처음으로 여권이라는 것을 발급받고 비자까지 준비하며 내 꿈을 향해 하루하루 정신없이 보냈다. 전역하고 나니 왠지 어른이 된 느낌이어서 그런지 유학비와 용돈은 이젠 내가 알아서 벌어서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어학원을 다녀오고 나서는 조금이나마 비행기값과체류 비, 유학비등을 마련하기 위해 알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알바도 요리학교로 유학을 갈 거 기 때문에 주방에서 감도 익히고 경험도 쌓을 겸 주방에서 일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았다. 요리를 배울 수 있는 곳을 찾던 중 “애슐리”라는 곳의 구인 사이트를 발견했다.애슐리라는 곳은 나도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다. 그런데 알바시간과 여러 가지 카테고리의 음식을 만들어 볼 수 있다는 말에 면접을 보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때 당시에는 TGIF, 아웃백, 빕스, 토니로마스, 베니건스등

패밀리레스토랑의 전성기였기에 미국식 매장 운영 시스템을

배울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패밀리레스토랑

계열의 매장을 찾던 중 애슐리를 알게 된 것이었다.


애슐리라는 곳은 내가 아르바이트하던 시기 전국에 5개 매장밖에 없었지만 패밀리레스토랑으로 다양한 메뉴를 만들어 볼 수 있다는 말에 한번 들어가서 경험을 쌓고 조리기술들을 익혀보자는 마음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또한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사업부이기에 뭔가 시스템 및 복지 제도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나는 정말 조용히 주어진 업무에 열심히 일을 했다.

시키는 업무 외에도 내가 매장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먼저 솔선수범하여 해병의 이름에 먹칠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지저분 한 곳은 깨끗하게 닦고 음식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만들어서 제공하였다.

나의 계획은 6개월 뒤 유학을 떠나야 했기에 6개월만 일하기로 협의하고 일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내가 3개월째 일을 하고 있던 시기에 내가 제일 오래된 직원이 되고 말았다. 이전 직원들이 한 번이 다 퇴사를 했기 때문에

내가 맡아서 해야 할 업무들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사람이 한 번에 다 나간 상황이라 인원부족으로 나는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1시까지 일을 하고 금요일에는 주말 영업 준비를 위해 새벽 2시까지 일을 하고 퇴근하기를 반복하였다.


“안되면 될 때까지”

군대에서 귀가 닳도록 들어온 이야기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언정 비판과 비난을 하지 말자!

일주일에 하루 휴무에 6일은 오마(오픈~마감)를 뛰어

매장이 원활하게 운영하는데 문제없이 임무를 완수했다.


3개월이 되던 때 점장님께서 트레이너를 해 볼 생각이

없냐고 물으신다. 당연히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근데 이미

트레이너 명찰과 유니폼등을 준비해 놓으셨던 것이다.

점장님! 저 이제 3개월 후에는 유학을 가야 해서 안 될 것

같은데요. 절대 통하지 않았다. 우선 트레이너 하면서 많이

배우는 것도 나중에 도움이 될 것이기에 해 보란다.

그래 이것도 나에겐 지식이 되고 도움이 되겠지!

트레이너가 되니 발주 및 품질관리, 신입직원 교육등

여러 가지 업무들을 서포트해야 했다.

해병대에서 그 고생을 하며 경험하다 보니 사회에 나와

이렇게 힘들게 일해도 견딜만했다. 이젠 한 달만 더 일하면

유학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는 시기가 다가왔다. 그런데 또 점장님께서 미팅을 하자고 하시더니 혹시 정직원에 지원해 볼 생각이 없냐고 물으신다. 당연히 나는 정중히 거절하였다. 우리 점장님도 고집이 엄청 있으셨다. 우선 한 번만 지원해 보자고 나를 설득하려 하셨다. 그 자리에서 우선 지원하겠다 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이건 내 계획이 아니야 그냥 그 말에

넘어가서는 안돼!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점장님께서 또 나를 부르신다.


“혹시 지원서 작성했어?”

“아니요! 안 했습니다”


점장님이 이젠 화가 나셨는지 출근한 지 10분 밖에 안되었는데 당장 퇴근하란다. 그리고 지원서 작성하고 접수까지 하라며 나를 집에 보내셨다. 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답답했다.

선임이 명령하면 거기에 복종하며 임무를 완수하는 게

몸에 배어서 그런지 “그래 그냥 지원서만 작성해서 접수하자”“어차피 나는 1년도 안된 아르바이트생이라 떨어질 거야!”

그래서 부랴부랴 디카로 증명사진처럼 벽에 기대어 대충 사진을 찍어 업로드하고 내 이력을 작성하여 접수를 하였다.

이젠 점장님 눈치도 안 봐도 되고 남은 한 달만 열심히 근무하며 버틸 생각에 시간이 정말 잘 갔다.

미국에 계신 친척분께서도 언제 오냐며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막바지 미국에 들어갈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을 때 지원서 합격 통보 메일이 왔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면접을 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난 취준생이 아니었기에 그리고 전역한 지 얼마 안 된 군기가

바짝 들어간 예비역이라 정장도 없었다. 어차피 한국에서는 입을 날이 거의 없기에 구입도 안 했는데 면접은 어떻게 가란 말인가.. 동네 동생에게 정장을 빌려 입고 면접을 보았다.

면접은 그룹인사팀에서 진행하다 보니 본사에 가서 면접을 봤는데 크게 떨리거나 두렵지 않았다. 그냥 내가 어떤 사람인지만 보여주고 오자 생각했다.


일주일 뒤 최종결과가 메일로 통보되었다.

“OOO님 최종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나는 6개월 만에 아르바이트생에서 정직원으로 채용이되었다. 단기간에 정직원으로 채용된 건 내가 아마 최초일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 제일 먼저 기억이

났다.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나에게 전혀 다른 길을 예비해 주신건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나의 인생의 2막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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