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
2003년 여름이었다.
처음 발을 디딘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은 무척 낯설었다. 익숙하지 않은 다양한 인종의 체취와 퀴퀴한 공기, 그리고 담배냄새까지 섞여 결코 좋은 첫인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항을 벗어나서 파리 시내로 들어선 순간 나는 직감했다. 파리를 사랑하게 될 것임을.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지극히 파리스러운(?) 건축물이 내 눈을 강타했다. 코너를 돌자 갑자기 나타난 에펠탑은 내 심장 속으로 들어왔다. 누군가는 개천이라고 평가하는 센 강 주변은 로맨틱했다. 더운 날씨에도 노천카페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홀짝거리는 파리지앵 할머니마저 우아해 보였다.
밤이 되고 반짝반짝 빛을 내는 에펠탑을 바라보며 내년에도 유럽으로 여행 오기를 희망했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파리를 사랑하고 유럽을 사랑한다. 매년 일주일씩 휴가를 내서 유럽 어딘가로 떠났다.
"그렇게 버는 족족 여행 가서 다 써버리면 나중에 나이 들어서 어쩌려고 그래?"
나를 걱정하는 지인들에게 종종 듣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내 심장이 뛰는 일에 돈을 쓰고 싶었다.
내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되는 순간은 여행하면서 만나는 멋진 전망과 노을과 길거리와 예술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한때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 카피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나는 매년 그 카피 문구를 외치며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프라하 카를교에서 바라본 야경과 피렌체 두오모 성당 앞에서 올려다본 코발트색 밤하늘에 감탄했고, 비 온 다음날 아침 체르마트 호텔 베란다에서 마터호른 산봉우리를 봤을 때는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카파도키아 열기구를 타고 막 떠오른 해를 바라볼 땐 주책없이 울컥했고 포르투 동 루이스 다리를 배경으로 울려 퍼지는 버스킹 공연은 나를 미치게 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대면한 고흐 작품에 숨이 멎었고, 한여름밤 비엔나 시청광장에 울려 퍼진 오케스트라 공연은 한때 내 플레이리스트를 클래식 음악으로 도배하게 만들었다.
유럽여행의 첫 경험은 내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20년 넘게 때로는 지인과, 때로는 언니 동생과, 그리고 자주 혼자 여행을 다녔다.
하지만 50대에 파이어족이 된 나는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여행을 하고 있다. 퇴직 후 처음으로 9일, 10일짜리 짧은 여행이 아닌 긴 여행을 다녀왔다. 한 도시에 오래 머물며 현지인처럼 살아봤다.
퇴직 전에는 6월 이후 주말에 출발하는 비싼 항공권을 눈물을 머금고 샀지만, 이제는 비성수기 평일에 출발하는 국적기 직항 항공권을 더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다.
그리고 지난 여행을 돌아보며 그때의 나와 만나는 작업을 시작하려 한다.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순간을 잊을 수 없어서다.
골목 모퉁이를 돌았을 때 뜻하지 않게 나타나는 풍경,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마신 맛있는 커피 한 잔,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웃으며 건네는 인사, 선뜻 무거운 캐리어를 들어 계단 위까지 올려주는 사람들의 친절함. 이런 순간들이 마음을 간질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느낀 햇살, 그날의 공기, 해 질 녘 길게 늘어지던 그림자, 예쁜 트램과 딸랑거리는 자전거 소리, 감성 충만한 버스킹 공연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잊히지 않는다.
존경하는 신영복 선생님은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더불어숲 2)이라고 했다.
그렇다. 여행은 아무리 멀리, 아무리 오래 떠나도 결국은 일상으로, 그리고 나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과거의 나와 화해하고 내일의 멋진 내가 되도록 오늘을 살아가는 것. 그 오늘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2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나의 여행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