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두 살 위인 남자형제가 있다. 어릴 때부터 말 잘 듣고 온순한 오빠와 그와 반대인 나는 차별을 받으며 자랐다. 같은 집에서 그는 온실 속의 화초로 자랐고, 난 황무지의 잡초로 자랐다. 부모에게 아들은 늘 기꺼이 챙겨줘야 하는 존재이며 말을 잘 들었기에 아들의 의견이나 소리보다는 부모가 하라는 데로, 지시하는 대로만 커갔다. 오빠는 자기주장이 뭔지 모르고 자랐을 것이다. 부모가 하라는 데로, 이탈하지 않고 부모가 가라는 데로 살았으니까 말이다. 상이하게 다른 자식을 키우는 부모입장에선 나보단 아들을 좋아했을 것이다.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깨물어서 아픈 손가락은 분명 존재한다는 걸 느꼈다. 자식이 둘 이상이 되면 아픈 손가락은 분명 존재한다. 나에겐 “넌 걱정이 안 돼, 사막에 떨어져도 살아갈 년이야” 라며 방치의 명분을 들어냈으니 말이다. 그로 인해 난 주체적이며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으로 살아왔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며 정체되고 고여있기 때문에 늘 움직이고 행동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운전하는 차의 핸들을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으며 말이다.
배우자는 나와 결혼하기 전까지 본인의 옷들을 시어머니가 사주었다. 처음엔 이러한 현상들을 깊게 생각지 못했다. 사실 이거 하나만 봐도 지금은 많은 걸 유추할 수 있는 분화된 불혹의 나이지만 그때는 몰랐다. 스물일곱, 그와 첫 번째 선을 본 후, 오랜 연을 이어가지 못했지만 그는 그 사이에 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건네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선물은 형수가 백화점에서 직접 골라 그에게 여자친구에게 선물하라며 건네준 선물이었다. 그렇다. 그는 무엇하나 자기 손으로 선물을 고르는, 자신의 움직임으로, 자신의 취향에 따라 옷을 구매하는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수동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이는 아침마다 텀블러에 물을 담아 등교하는데, 물 담는 일도 스스로 하라며 일러주었었다. 하지만 배우자가 물을 담아줬던 모양이다. 교대근무를 하는 배우자가 오전에 일찍 출근하자 아이는 내 방으로 와서 물을 담아달라고 이야기했고, 난 그 사실을 여태껏 간과했었다. “물을 담았니? “라고 물어보며 아이는 늘 ”응 “ 이라며 답했었기에 아이가 스스로 잘하고 있는 줄만 알았었다.
단지 물 담는 행위일 수도 있지만 아니다. 배우자는 아이도 수동적인 아이로 자라게끔 양육하고 있었다. 부모 없이는 할 수 있는 영역들이 적게끔 조성하고 있다. 늘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주기를 원했고, 성에 차지 않으면 자신이 그 몫을 자처하며 해줬었다. 난 아이에게 말했다. “텀블러에 부모가 물을 매일 담아주는 것, 그거 어려운 일 아니야. 충분히 해 줄 수 있어. 네가 어렸다면 당연히 엄마가 해줘야 하는 몫일 거야. 그렇지만 넌 많이 성장했고, 그 성장이 보이는 몸의 성장만 일어나기보다는 몸과 마음 모두 성장해야 하는 거야. 부모는 너에게 물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줘야 하는 거지, 너 앞에 물고기를 놔두면 그건 자식을 올바르게 자라게 하는 방법은 아닌 것 같아. 너 앞에 다양한 물고기를 잡아서 놔줄 수 있어. 어려운 일 아니야. 하지만 그러므로 인해 넌 늘 부모에게 의존하게 될 것이며, 결국엔 수동적인 인간이 될 수도 있어. 엄마는 네가 주체적으로 살길 바래. 하루의 시작도 너의 움직임으로 시작해서 네가 옷을 골라 입고, 너의 물을 텀블러에 담으면서 말이야.” 비단 시작은 자그마한 물 담는 행위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아침의 이 작디작은 사건은 나의 마음속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난 내 아이만큼은 수동적인 남자로 자라는 걸 원치 않는다.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그물에 걸려 포위당해 ‘내가 부모고, 부모가 나’인 위험한 밀착관계들을 보고 자랐다. 그게 궁극적으로 어떻게 인간을 수동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까지 말이다. 자기 생각은 없고 자신의 삶에서도 부모의 생각이 마치 자기의 생각인 것 마냥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생각 없이 움직이며 행동하는 모습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