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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i May 23. 2024

제3의 성 : 엄마와 아줌마

여자와 남자, 이 두 개의 성만이 존재하는 줄 알았다. 임신과 출산 양육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엄마, 자칭 남들이 부르는 ‘아줌마’라는 제3의 성. 여자로서의 삶은 지워진 채, 엄마답게, 아줌마다운 삶이 요구되어지면서  다른 의미에서의 성정체성 혼란을 겪었다. 유교사상이 뿌리 깊게 박힌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한 당위성이 발휘되어 만들어진 경직된 사고방식은 다시 사랑을 하고 싶으면 다시 태어나야지만 가능하다며 우스갯소리를 하게 만든다. 여자의 삶과 기능은 자연스럽게 지워진 채, 주홍글씨처럼 박재되어 살아가야 하는 답답함을 가진 채, 아줌마로 살아가는 나날들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지금은 내가 정한 제3의 성에서 벗어나 원래 내가 가진 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만 그런 타이틀이 붙여진 왕관이 주어진다 한들 내가 벗어던지거나 안 쓰면 그만인 것이고, 그들의 입맛에 맞게 살아가지 않고 원래의 ’ 나답게 ‘, ’ 나스럽게 ‘를 잊지 않고 놓지 않고 살아가면 그만인 것이다.


여자의 적은 여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난 같은 여자들에게서 의구심 품은 질문들을 받았다. ”아니 애엄마가 옷차림이 왜 그러세요? “. 애엄마스러운 건 대체 뭘까? 한 아이의 엄마이기 전에, 한 남자의 배우자이기 전에 난 원래 ‘나’라는 사람이었다. 나라는 존재를 왜 결혼과 동시에 지워지고 변화되길 바라는 걸까?


결혼은 아직도 여자가 한 남자의 집안에 ‘편입’되어진다는 문화가 많이 옅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처음 결혼생활을 하면서 ‘나’라는 존재 자체는 상대집안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혼을 했으니 남자의 집안 풍습과 가풍에 따라져야만 했다. 친구는 “히잡을 써야 하는 문화라면 네가 맞춰서 히잡을 쓰면서 살아야 하는 거야. 원래 결혼이라는 건 그런 거야”라고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자란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나는 ”야, 나는 삼십 평생 히잡을 쓰고 살지 않았는데 대뜸 그냥 무조건 써야 한다면 써야 하는 거라고? 뭐 닥치고 이유불문하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까라면 까야하고, 히잡을 쓰라하면 써야 하는 거야? 설득도 이해도 없이? 왜 그래야 하는 건데? “ 화가 잔뜩 난 채로 친구에게 난 토로했다.


점점 아줌마와 엄마, 배우자의 집안에서 만들어준 프레임에 나는 점점 갇혀지고 있었다. 마틴 셀리그만의 ‘학습된 무기력’ 실험의 개들처럼 난 변화를 꽤 하지 않고 의지도 없이 안주하며 그 프레임 안으로 점점 깊이 들어갔다.  


아이가 어릴 적, 센터에서 놀이치료를 받으면 마지막 10분은 간단한 부모상담이 이루어졌었는데, 그날은 배우자와 함께 상담에 임했고 놀이치료선생님은 아이를 치료하면서 우리 부부에게도 숙제를 내주었었다. 책 한 권을 각자 읽어오는 숙제였고 서로에게 바라는 점을 책에서 제시한 7가지 중 하나를 고르라는 질문을 주셨는데 나는 ‘인정’이었고, 배우자는 ’ 희생‘이였다. 이 얼마나 창과 방패 같은 대답인가.


그때 당시 난 여자가 아닌, 나의 존재는 지운 채, 아이의 엄마로서 그 집안의 며느리로서, 배우자의 아내로서 매일매일 나를 갈아 넣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가장 원하고 듣고 싶어 했던 말은 인정의 말들이었다. “네가 애쓰는 거 나는 알고 있어. 고마워, 수고했어. “ ”우리 힘든 시기를 같이 이겨내 보자. “ ”네가 많이 노력하고 있는 것 내가 무심하듯 보여도 알고 있어. “ 이런 말들을 듣지 못했기에 인정이 고팠었다. 하지만 그가 나를 인정하기엔 나의 희생이 부족했다고 느꼈던 것일까? 그는 더 많은 ’ 희생‘을 원했다. ‘아니 내가 이 이상 얼마큼, 얼마나 더 많이 희생해야 하는데, 난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고 맥시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더 많은 희생이라니..’ 그의 기준엔 턱없이 못 미치는 수준이었던 것일까? 그 빌어먹을 희생을 더 많이 원하다니 그놈의 희생이 뭐길래. 난 그 날이후 ‘희생’이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생각했다.


’ 희생‘은 남에게 요구하거나 원해서는 안된다는 걸. 난 그에게서 인정의 말들을 포기하는 대신 더 많은 희생을 원하는 그에 대답에 응하지 않았다.


내가 제3의 성으로 지칭하는 엄마나 아줌마는 ’ 희생‘이라는 단어를 배제하고는 그 어떠한 단어로도 설명이 역부족하다. 엄마나 아줌마를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난 ’제3의 성‘인 그녀들의 보살핌, 보호, 희생, 극진한 수고스러움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고, 평가절하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너무 그 프레임에 갇혀 자신을 잃으면서까지 애써 무한한 희생을 하지 않으며 자기다움을 잃지 말고 살라며 감히 당부하고 싶다. 나보다 조금 더 많이 산 그녀들이 나에게 당부했다. 나만은 당신네들처럼 미련하게 희생하며 살지 말라고, 뒤늦게 후회하기에 너무 멀리 와있는 당신네들은 후회스럽다고. 그리고 지금의 나를 한없이 응원하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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