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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i May 18. 2024

아이와 나

생각은 고여있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의해, 다양한 역동에 의해 흘러가며 변해간다.

나의 분신 같았던 아이와 끈적하고 단단한 밀착관계에서 사춘기가 다가오는 나이가 되니, ‘나만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났다. 그만큼 나도 아이도 건강한 분리개별화가 잘 되어가는 과정이라 본다.


아이가 6살 때, 내가 시댁행사에 참석하지 않겠다며 공표했을 때, 배우자는 시댁에 대한 나의 단독적인 의사표현에 본인의 집안을 무시한다며 이혼을 언급했었다. 이런 언행도 예상 시나리오에 있었던 터라 난 당황하지 않았다. 그 정도 배포는 가지고 그 집안에 반하는 행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배우자의 집안에서 무시당하며 지독한 상하관계에서의 핫바리 역할은 당연한 것이라 여겼던 것일까? 난 내가 당신네 집안에서 무시당한 일들은 전혀 고려하지도 배려하지도 않느냐며 따져 물었다. 내가 당한 건 당연하고 마땅히 내가 받아야 하는 것이고, 참고 참다가 폭발하게 만든 나의 행동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던 것일까? 극명한 온도차에 나는 더 배우자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혼의 이유가 당신네 시가와 교류하지 않는 이유라니 납득이 되지 않았고, 하나 더의 큰 이유는 어린아이의 존재였다. 나 또한 이혼을 염려하고 있었지만 아이가 너무 어리다고 호소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이제 다 컸다’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이었고, 그날, 우리의 대화에서 마무리는 짓지 못했다. 난 다음 날, 정신을 똑디 차리고 변호사와 전화상담을 했고, 배우자는 하루 사이에 심경의 변화가 왜 때문에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 너를 이해할 수 없지만, 너에게 맞추겠다 ‘라는 말에 우리의 사이는 남북관계처럼 3.8선이 그어져 휴전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상적인 가족에 대한 갈망의 노력이 남아있던터라 건강한 부부관계를 위해 부부상담을 같이 하며 노력하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2년여간 동안 부부상담을 했지만 이견을 좁히기엔 역부족했다.


아이는 대화가 없는 부부사이에서 발화가 늦었고, 발달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골든 타임을 놓치면 더 힘들어질 걸 알았기에 4-5년간 믹서기에 갈아 넣는 양육을 했었다. 4살 무렵, 다른 아이들과 다른 행동발달과 미발화로 대학병원 및 치료센터를 전전긍긍하며 아이의 정상발달을 위해 노력했었다. 집에 있는 티브이며, 소리 나는 장난감들, 자극적인 모든 것들을 다 처분했고, 눈 맞춤과 상호작용, 그리고 말에 집중하며 선생님들과 협업하며 3년 정도 나는 없이 아이에 나의 24시간을 몰빵 했었다. 그리고 또래 아이들과 비슷해지기 시작한 7살 때부터 유치원에 다시 보내기 시작했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양육이 편안해지기까지 난 오래 걸렸다. 예민한 기질의 아이는 뒤늦게 정상 궤도에서 또래들과 같이 뛰기에는 페이스메이커가 초저학년 때까지 필요했기에 옆에서 늘 함께 밀착마크하며 조마조마하며 아이를 양육했었던 것 같다.


이제는 어느새 초등학교 끝자락에서 늠름해진 모습을 보니 아이도 나도 대견스럽게 느껴진다. 밀착했던 나와 아이의 관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기가 원활하게 흐르고 나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이게 빈 둥지 증후군에 맛보기인걸까? 허하디 허한 마음과 자기 혼자 큰 것처럼 행동하는 아이의 행동에서 섭섭함도 느끼지만 내가 감당하고 이겨내야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전에는 나만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혔었다. 내가 주양육자이고, 나만큼 아이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으며, 나만이 아이를 올바르게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 생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했다. 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키웠기에 이 이후의 발걸음은 부모의 영향력보다는 아이의 선택과 결정이 더 큰 몫을 한다고 본다. 부모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아이 본인과 또래관계의 영향은 커져가는 시기가 온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아이의 공부를 가르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참고로 아이가 저학년 때까지 아이의 학습을 도맡아서 피아노, 영어, 전 과목을 가르쳤었다. 물론 학원과 병행했었다.) ”아들아, 네가 주인인 너의 큰 배에 엄마는 잠시 탑승한 거란다. 너의 배의 키를 우린 같이 잡고 있는 거야. 엄마는 네가 너의 배를 잘 운항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키를 잠시 잡은 것뿐이야. 궁극적으로 너의 배의 키는 네가 잡게 될 거야. 지금은 엄마가 잠시 그 역할을 도맡고 너를 가르치고 있는 중이고, 네가 잊고 있는건지,  모르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엄마도 엄마 배가 있어. 엄마도 곧 너의 배에서 내려 엄마 배로 가서 엄마 배의 키를 잡을 거야. 우리는 넓디넓은 망망대해에서 서로의 배를 운항할 거야. 때로는 가다가 정박하며 만날 수도 있는 거고, 필요하면 건너 탈 수도 있는 거란다. 이 배의 주인은 아들이고, 엄마는 곧 엄마 배로 가야 한다는 걸 잊지 마. 알겠지? “

”엄마 그게 언젠데? “

”엄마가 추측건대 네가 한 5-6학년쯤 됐을 때가 아닐까 싶어 “


그때의 대화가 예언처럼 돼버린 듯, 자연스레 난 지금 나의 배에 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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