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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 Oct 18. 2024

prologue

시간을 걷는 방식

축축하고 뜨거운 공기를 밀어낸 시원한 바람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어느새 대지에 숨어든 가을 햇살이 참 눈부시다. 마음마저 축축 처지게 만들었던, 참으로 지난했던 여름이었다. 습하고 더운 기세를 몰아내고 자리한 신선한 바람을 타고 경색됐던 감정들이 돌아온다. 가을의 가온이다.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받게 되는 선물이다. 가을 하늘, 토요일 아침, 보드라운 이불의 촉감. 그리고 유리창 밖의 풍경..


하나 둘 나이를 가질수록 보이는 것이 많아진다. 나이가 갖는 매력이다. 무심코 흘려보낸 젊은 날의 아쉬움은 오늘 가장 젊을 나에겐 새로운 안락함이 되기도 한다. 해가 거듭돼도 대지를 채우는 가을 공기와 햇살은 그대로인데 변덕스러운 내 감정들은 그 모양을 달리한다. 실수와 착오, 무지와 무식을 깨닫고 나니 머리에 떠오르는 감정은 지난날의 아쉬움과 부끄러움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잃었지만 잃은 것만은 아니니까.


류시화 작가님이 엮은 말씀처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다면 나의 내면이 조금은 더 깊어졌으려나. 지금 보다 조금은 더욱 좋은 사람이 되어 있었을까. 어차피 그마저도 판단의 주체는 자아(我)다. 뭐 아니라고 한들 어떤가. 이제라도 깨달았으면 됐지. 가을이잖아. 때가 되면 만날 수 있는 당연함은 참 감사한 일이다.


돈을 벌 나이가 되면서 뒤쳐지면 끝이라는 생각에 늘 바쁘게 살았다. 각막에 낀 안개를 걷어내며 달린 덕으로 젊은 그에게 얻은 것이 적지 않지만, 흔적은 상처가 되기도 했다. 열정에 기름을 부었다. 폭주했다. 삶의 분주함의 대가로 젊음의 일부를 내어 주었다. 남이 만든 기준과 평가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한 탓이다.


과거의 나에게 받은 선물은 가시성이다. 조금씩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젠 시간을 걷는 방법을 바꾼다. 하루를 꽉 채울 필요는 없다. 조금 일찍 일어나 이른 새벽을 맞이 하지만 그것이 채우기 위함은 아니다. 시간의 시작을 잡으려는 의식으로, 그 자체로 유의미하다. 하루를 비우려고 시도로, 하루가 채워지기 시작한다. 생각이 경색되지 않으니 나와 타인의 다름을 순수하게 인정하게 된다.


찰나에 지나지 않은 순간의 즐거움에 너무 매몰되는 것이 변화를 막을 수도 있지만, 일상의 행복감이 삶을 지탱해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선물꾸러미도 한 날이고, 세상의 주인공이 된 듯했던 어린이날도 한순간이다. 소년의 어린이날도, 젊은이의 크리스마스이브도 사라졌지만, 일상의 소중함을 얻었다. 당연함에 감사하고 나니 하루하루가 무척 소중하다.


80년대 대한민국은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라고 했다. 돈이 행복을 가져오지 않는다고도 했다. 밀레니엄을 지나 세기가 바뀌고 나니 돈이 나쁜 것이냐고 되묻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부자가 도대체 왜 나쁜 것이냐며, 부자아빠와 가난한 아빠를 비교했다.


갈수록 후퇴하는 정치 수준과 사회구조, 더욱더 벌어지는 빈부격차 속에 대한민국은 재물성애자로 몸짓을 더욱 키우고 있는 것 같다. 쉼표 없는 하루가 반복되고 사람들은 도파민을 찾아 방황한다. 서점을 뒤덮은 책들의 대부분은 경제적 자유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젊음 따위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조금은 내려놔도 된다고.


어차피 세상은 명답 찾기다. 시간을 걸어가는 길이 정답을 찾는 여정일리 없다. 역행자가 되지 않아도 돈의 속성을 오롯이 좇지 않더라도 각자만의 방법으로 sayno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남의 기준에서 자유로울 용기는 필요하겠지만.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이미 울긋불긋하게 옷을 갈아입는다. 무심한 시간을 유심하게 바라본다. 시간 안에는 크게 애쓰지 않아도 가슴을 채우는 작은 행복들이 있다. 작은 이야기와 행복들에게 더욱 관심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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