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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진 아줌마 Mar 05. 2024

2-4. 몸과 마음, 하나가 아니되 둘도 아닌

 

지금까지 우리는 인체가 다양한 에너지 스펙트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래서 육체와 마음이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막상 우리의 경험 속에서는 몸과 마음이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왜 그럴까? 오늘은 몸과 마음의 감각이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몸과 마음의 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비유는 아마도 얼음과 수증기일 것이다. 얼음과 수증기는 질료가 같다. 다만 그 질료(물 분자)의 운동이 활발하면 수증기가 되고, 온도가 낮아지면(=에너지가 낮아지면) 얼음이 된다. 그러니까 둘은 본질적으로는 하나인 셈이다.


하지만 그 존재 상태에 따라 속성은 완전히 다르다. 얼음은 형태가 있고 수증기는 형태가 없으며, 얼음은 차게 느껴지고 수증기는 차게 느껴지지 않는다. 즉 얼음과 수증기는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인데, 몸과 마음의 관계도 이러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얼음(육체)과 수증기(감성체)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에 외부에서 자극이 가해지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누군가 망치를 들고 내리친다고 생각해 보자.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면 견고한 물체는 그것을 '충격'의 상태로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외부에서 큰 힘(에너지)이 가해지면, 얼음은 그 충격으로 인하여 형태를 보존하지 못하고 파괴되는 변화를 겪는다. 즉, 견고한 물체에게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에너지가 '파괴 혹은 보존'을 결정하는 '힘'으로 인식될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걷다가 책상에 부딪히면, 충격을 받은 부위의 세포들이 파괴되어 멍이 든다. 그리고 그 변화가 우리에게 '육체적 고통'으로 지각된다.


그런데 수증기는 상황이 좀 다르다. 수증기는 파괴될 견고함이 없기 때문에, 망치로 내려쳐도 파괴되지 않는다. 대신 수증기는 급격한 진동의 변화를 겪을 것이다. 즉, 누군가 망치로 내리칠 때, 우리의 감성체는 갑자기 물결이 치듯 입자가 흩어지고 흔들리는 파동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상태를 우리는 아마도 '불안감', '혼란스러움' 등의 심리적 어휘로 표현할 것이다. 즉, 그 전해지는 느낌이 달라서 각기 다른 어휘를 사용하고, 그에 따라 '몸과 마음'이라는 견고한 인식적 구분을 세우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몸과 마음이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차이'는 인류에게 오랫동안 설명되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인간이 공간적 점유(연장延長)를 속성으로 하는 육체와, 사유를 속성으로 하는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원론을 내놓았고 지금도 우리는 그 인식적 지배의 영향 아래 살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간략히 살펴보았듯이, '미시 세계'의 발견은 데카르트의 한계를 넘어 존재의 진실에 한 발 다가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존재 입자'라 말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그 중 입자들이 조밀하게 뭉쳐진, 그래서 거시 세계의 물체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영역을 육체로 인식하고, 조금 더 미세하고 자유로운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외부 자극을 '물리적 힘'이 아니라 '진동의 변화'로 지각하게 되는 영역을 마음이라 인식할 뿐이다.


우리에게 몸과 마음이 모두 필요한 것은, 우주가 각기 다른 진동과 밀도를 지닌 다양한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주에는 돌멩이도 있고, 극미세의 아원자도 존재한다. 그래서 그 우주에서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는 돌멩이를 감각할 육체도 필요하고, 육체로는 변별하기 어려운 미세 변화를 감각할 마음, 즉 더 미세한 입자로 이루어진 심체(心體)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감성체의 진동 변화가 지성체에게는 '정보의 변화'로 인식될 것이고, 이것이 우리가 '사유'라 부르는 정보 처리 과정의 데이터가 될 것이다. 그러니 데카르트의 결론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다만, 그는 연속되는 스펙트럼의 양 극단만을 취함으로써 하나의 실체를 둘로 나누는 오류를 범했는데, 에너지의 존재를 몰랐던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했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후예로 출발한 과학은 현재 육체를 존재의 전부로 규정한다. 그래서 각 개체를 완전히 독립적이고 닫혀 있는 계(시스템)로 파악한다. 하지만 예로부터 종교나 영성계에서는 인간의 상호 연결성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여 왔는데, 마음의 질료까지를 고려해 생각해 보면, 두 입장이 극명하게 다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해된다.



물질적 육체로서의 우리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심체까지를 고려하면 우리 중 누구도 온전히 독립적인 개체는 없다. 우리는 각기 다른 둘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감성과 지성의 망으로 연결된 하나의 운명체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공동의 운명'에 대한 관심과 자각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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