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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진 아줌마 Jan 05. 2024

첫 기 싸움의 추억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아이의 '첫 기억'을 만드는 일이었다. 뇌는 어떤 정보든 처음 접할 때 가장 잘 받아들이고 오래 기억한다. 반면 한 번 새겨진 정보는 특별한 계기가 없이는 잘 변하지 않는다. 당연히 아이를 키울 때도 바람직한  첫 기억을 만드는 데 공을 들였다. 특히 첫 기 싸움의 날이 중요했다.




태어난 후 얼마까지 아기는 특별한 취향이나 자기주장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세상을 감각적으로 탐험하는 데 온통 마음을 쏟는다. 그러다가 몇 개월이 지나 감각기관이 여물면 취향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어느 날 그 욕구를 관철하기 위해 떼를 쓰기 시작한다. 바로 이 날, 부모와 아이의 첫 기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만약 아이를 진심으로 위한다면, 부모는 이 날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날, 아이는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태도를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딸 원이에게는 그것이 9개월쯤 찾아왔다.


어느 날,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을 때였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아이가 밥그릇을 밀쳐내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식사를 하던 세 사람은 눈빛을 교환하며 마침내 올 것이 왔음을 알았다. 이런 순간이 올 것을 미리 알고 민방위 훈련하듯 준비해 왔던 터라, 우리는 당황하지 않고 약속한 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먼저 나는 아이를 안아 올려, 거실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소파에 떼를 쓰는 아이를 내려놓은 후, "여기서 다 울고 그만 울고 싶을 때 다시 와."라고 말하고는 식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즐거이 과장된 웃음을 나누며 식사를 이어갔다. 물론 아이의 동태를 곁눈질하면서.


처음에 더 크게 떼를 쓰던 아이는 곧 이것이 하등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힘만 드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그러고는 잠시 소파에 앉아 있더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슬금슬금 식탁으로 다가왔다. 이 때가 중요하다. 나는 아이가 무안하지 않도록 활짝 웃으며 다가가 아이를 다시 안아 앉히고는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살폈다. 그 날 아이는 가장 온건하고 다정한 방식으로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원하는 것이 있을 때는 적절한 방식으로 의사를 전달해야 함을 배웠다. 이후 한두 번 더 이런 일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어른들이 일관되게 행동했으므로 이후 아이는 떼를 쓰는 일이 없었다.


체화된 습관은 아기 때뿐 아니라 사춘기가 되어서도 이어졌다. 아이는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것이  원하는 것을 얻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기 때부터 체득했다(이후에도 나는 적절한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딸은 거절을 당하면 짜증을 내는 대신, 새로운 논리와 태도로 엄마를 설득할 궁리를 한다. 때로는 이런 과정이 두세 번 반복되기도 하는데, 그러면 어지간해서는 아이의 부탁을 들어준다. 그 정도로 간절한 일이라면 무엇을 경험하든 해 봐야 하고, 그 정도로 간절한데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이후로는 의욕이 꺾이거나 엄마의 도움 자체를 기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제법 철이 든 아이는 엄마가 이런 식으로 양보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때로는 자기가 알아서 먼저 양보를 한다. 그래서 사춘기를 통과하는 내내 우리 모녀는 언성을 높일 일이 없었다. 인생 9개월차의 어느 날에 갖추어진 태도는, 대한민국 입시생이라는 극악한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다.


무엇이든 첫 경험이 중요하다. 아직 채 여물지 않은 아이의 뇌에 무엇이 먼저 새겨지느냐에 따라 이후 아이의 인성이 어느 방향으로 발달할지가 결정된다. 수많은 가능성과 잠재력 중에 아름다운 성향과 태도가 먼저 꽃필 수 있게 도와주는 일, 내가 아이에게 주고 싶었던 선물은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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