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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 bird Apr 12. 2023

나쁜 남자가 취향입니다

C 이야기 

글의 제목을 바꿔야 되나 라는 고민을 했다.

나쁜 남자가 취향인 게 아니라 단지 나의 남자를 보는 눈이 후진게 아닌가 라는 자아성찰 비슷한 것 때문에?

그래도 이왕 지어놓은 제목 이번에는 내 인생의 두 번째 나쁜 남자 C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C와는 25살 때 만났다.  그는 나보다 4살 어렸고, 상근으로 집 근처에서 군복무 중이었다. 

C와의 첫 만남은 카페를 통해서였다. 

한창 벚꽃이 예쁠 무렵 나의 마음에도 뭔가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 벚꽃놀이를 함께 갈 사람을 구하는 글을 올렸고, 그 글을 보고 C가 말을 걸어왔다.

C는 군인신분이기에 일정 지역을 벗어날 수 없다고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올 수 있냐고 물어봤다. 

T와의 이별 후에도 몇 번의 짧은 연애는 했으나 당시의 나는 혼자였고, 사람이 그리웠는지 사랑이 그리웠는지 나는 가겠다고 했다. 


C와의 첫 만남은 신탄진이었다. 첫 만남을 위해 나는 무궁화호를 타고 신탄진으로 향했다. 

어릴 때부터 허파에 바람만 들어 지방에 놀러 갈 때면 KTX나 비행기를 자주 이용했는데, 신탄진은 KTX가 정차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무궁화호를 탈 수밖에 없었다. 

창 밖으로는 봄이라 아직 황량한 논들과 군데군데 흐드러지게 핀 벚꽃들이 드문드문 빠르게 지나갔다. 


나 생애 처음의 신탄진역. 당시 C는 휴대전화조차 없었기에 우리는 마치 옛날 드라마처럼 서로의 인상착의를 미리 정하고 만나기로 했다.

그는 검은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나오겠다고 했고, 나는 아이보리색 니트 원피스를 입고 나가기로 했다. 

C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신탄진역 자체가 이용객이 그리 많지도 않았을뿐더러 우리 또래의 젊은 사람은 더더욱 찾기 힘들었다. 


C는 182cm의 아이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꽃미남 스타일의 청년이었고, 상큼한 얼굴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내 취향인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서로 어색한 듯 인사를 주고받은 뒤 C는 나를 KT&G 벚꽃길로 안내했다.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신탄진의 KT&G 벚꽃길은 숨겨진 벚꽃 명소이다. 사람은 거의 없고, 벚꽃은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조금 아쉽다면 그리 길지 않고 짧은 코스라는 정도


그렇게 20대의 젊은 청춘 둘은 벚꽃 아래를 걸으면서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나눴다. 

처음 만나는 사이에 딱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건 싫어 자라온 이야기, 지금 다니는 직장 이야기,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정말 정해진 화제 없이 되는대로 얘기를 나눈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어떤 작은 다리 위에 멈춰 서서는 잠깐 같은 곳을 바라봤다. 

C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는 겸연쩍은 듯 내 시선을 피했고 나도 뻘쭘함에 같이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짧은 꽃놀이를 마치고, 그가 자주 간다는 백반집에서 저녁을 먹은 뒤 나는 다시 본가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카페 쪽지가 한 통 와 있었다.

'우리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요? ' 


그렇게 C와 연락을 주고받게 되고, 그에게는 핸드폰이 없었기에 컴퓨터 메신저를 서로 등록해서 대화를 주고받게 되었다. 

그냥 정말 일상적인 대화들. 지금 뭘 하고 있으며, 밥은 뭘 먹었고, 언제 잘 거다. 

그러던 어느 날 C가 '보고 싶어요.'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이런 요망한 남자 같으니라고.... 아이돌 같은 얼굴 하고서는 보고 싶다 그러면 안 갈 수가 없지 않은가..

'다음 off일 때 놀러 갈게요.' 

나는 그렇게 그와 약속을 잡았다. 


두 번째 만남 역시 신탄진

군인 신분인 그는 함부로 일정 지역 이상을 벗어날 수 없었기에 우리의 만남은 1번을 제외하고는 계속 신탄진이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도 우리는 하염없이 걸었다. 

지난번에는 벚꽃로드를 걸었다면 이제는 나무들이 조금씩 초록 이파리를 싹 틔우고 초록 그늘을 드리워주는 계절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또 걷다 보니 예전에 서로 시선을 회피했던 그 다리까지 오게 되었다. 

갑자기 C가 "아 나 이제 더 이상은 못 참겠어요." 라더니 손을 뻗어 내 손에 깍지를 꼈다. 

"누나 나 되게 한심한 남자고 능력도 없는데 근데 누나 좋아해요. 나랑 사귈래요?" 

갑작스러운 전개였다. 예상을 못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어.. 지금요? 이렇게 갑자기?"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그가 잡고 있는 손을 빼내지도 못했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그럼 천천히 대답해 줘요."라고 능글맞게 얘기했다.


여담이지만 예전 작품에서도 밝혔다시피 나는 인터섹스였고, 당시는 심지어 수술 전이기까지 했다. 

C는 일반 여성과 트랜스젠더 여성을 모두 여성으로 보는 사람이었고, 그의 입장에서 나는 그냥 여자라고 했다. 

아마도 내가 남자 보는 눈이 낮은 건 나의 이런 육체적 상황도 많이 기여했을 것이다. 

일반적인 만남을 가지기에는 나 자신의 상황이 그렇지 못했고, 나는 사랑받을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불안 때문에 날 좋다고 하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으면 더 재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C와 저녁으로 간단히 분식을 먹으러 왔고, 군인이라 돈이 없을 그를 대신해 저녁값은 내가 계산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C가 다시 한번 말했다. 

"싫으면 지금 딱 말해. 아님 우리 오늘부터 1일이다?" 


충청도의 특유의 능글맞음 때문일까? 아님 아이돌처럼 잘생긴 그의 외모 때문일까 

나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게 싫지는 않아 피식 웃으며 "그래 오늘부터 1일"이라고 답했다. 


C와의 데이트는 일정한 패턴이었다. 내가 off인 날 C를 만나러 신탄진으로 간다. 

둘이 저녁을 먹고 밤을 같이 보낸 뒤 아침을 먹고 가볍게 산책을 한 뒤 헤어진다. 

그는 군인이라 돈이 없으므로 모든 결제는 다 내 몫이었다. 


그렇게 C와는 1년 가까이 교제했다.

그는 10살 어린 아직 초등학생인 남동생이 있었으며, 지독하게 남동생 바라기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전도사님 사역을 하신다고 했고, 그의 집은 세탁소를 운영한다고 했다. 

어머님도 충청도 특유의 유쾌함으로 그에게 '내 배로 낳았지만 대체 누가 너 같은 놈이랑 사귀냐.'라고 하신다고 했다.

휴대전화가 없는 그였기에 그는 가끔 공중전화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했고, 그 통화는 결코 길지는 않았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아 설레기에는 충분했다. 


딱 한번, 그와 서울에서 데이트를 한 적이 있다.

난생처음 가보는 은평구. C가 어린 시절 잠시 살았던 동네라고 했다. 

볼일 때문에 잠시 서울에 갈 일이 생겼는데, 나와 항상 신탄진에서만 데이트를 했던 게 마음에 걸려 서울 데이트를 계획했다고 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그가 나에게 밥을 샀고, 그가 모든 데이트 비용을 지불했다. 


거기까지만 받았으면 좋았을 걸 나는 그에게 휴대전화가 없어 연락이 잘 되지 않는 불편함을 핑계로 핸드폰을 선물했다. 

물론 내 명의로. 요금 청구도 내 앞으로... 

그만큼 나는 관계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고, 사랑에 대한 갈망이 있었나 보다. 


그는 손사래를 치면서도 결국 핸드폰을 받았고, 그로 인해 C와의 연락은 조금 더 수월해졌다. 


처음 한 두 달은 그도 기본요금 이상 나오지 않게 조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그의 핸드폰 사용료는 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한 다툼도 잦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나의 수입 역시 많은 편은 아니었기에, 그와의 데이트비용, 휴대전화 비용 이런 건 부담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매 월 휴대전화 비용이 청구될 때면 예상보다 많이 나온 그의 전화비를 메꾸느냐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벌벌 떨렸지만 그래도 덕분에 그와 원할 때 연락이 되니 이게 낫다고 자신을 합리화했다. 


연애의 묘미 중 하나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둘만의 미래를 꿈꾸는 것 아닐까?

C와의 데이트도 주로 그러했다.


주로 같이 사는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게 결혼 얘기였다.

결혼을 하려면 나는 성별을 한쪽으로 결정해야 하고, 그에 맞는 수술들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럼 자연스레 언제쯤 수술을 하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는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럴 때마다 C는

"그냥 그 수술 안 하고 호적정정 안 하고 둘이서 동거인으로 살면 안 돼? 난 너 수술 안 해도 괜찮은데... " 

라며 수술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다. 

"내가 사회적으로 불편하지 않게 살려면 수술은 해야 돼. 이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거 같은 거야." 

나도 수술이 무서우면서도 단호하게 이런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수술은 막연히 언젠가 해야 하는 것이었고, 수술을 하고 나면 당연히 한 남자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나갈 줄만 알았다. 

C와 이런 소소한 대화를 나누면서 미래를 꿈꾸는 것이 당시에는 그저 행복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어떤 집에 살고 싶은지, 어떤 가족의 형태를 원하는지, 어디로 여행을 가보고 싶은지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미래를 공유했다. 


그리고 사랑의 시작에는 반드시 끝이 뒤따른다.


C와 1년이 돼 가는 어느 날. 그날은 정말이지 뭐가 하나도 안 풀리는 어느 일요일이었다.

주말에 근무했던 나는 업무 준비를 위해 병원 홀에서 청소기를 돌리는 중이었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복도 끝쪽에 서있던 화병이 청소기 줄에 걸려 쓰러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그날따라  오전부터 환자용 화장실 변기도 막히면서 변기를 뚫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해야 했고, 한 숨 돌리고 점심을 먹으러 갈 때쯤 C로부터 문자가 하나 날아왔다.


'나 해야 할 말이 있는데 잠시 통화 가능해?' 


인터섹스라더니 이럴 때 육감은 영락없이 여자의 그것과 같다.

손 끝이 떨려온다.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할지 머릿속에 이미 떠올랐다. 


'6시간만 이따가.. 무슨 말이 됐던 6시간만 이따가.. 나 오늘 일 너무 힘든데 지금은 그런 소리까지 듣고 싶지 않아.' 

제발.. 제발.. 제발... 지금은 안돼.. 이미 너무 힘들어 


하지만 아랑곳 않고 그에게로부터 전화가 걸려왔고, 나는 그 전화를 무시했다. 


이윽고 울리는 문자


'누난 나한테 굉장히 과분한 여자야. 해준 것 없는 나에게 항상 이거 저거 베풀어주고. 그래서 나 미안해서 더 이상은 못하겠어. 좋은 남자 만나서 잘 지내야 돼.' 


'넌 나에게 과분한 사람이야.' 

사람이 정말 할 말 없게 만드는 마법의 문장 같다.

과분한데.. 미안한데.. 고마운데 왜 헤어지자고 하는 걸까?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일하다 말고 화장실에 숨어들어 엉엉 울고야 말았다. 


왜 하필이면 오늘이었을까.. 오늘처럼 힘든 날 그는 나에게 이런 큰 충격을 준 걸까


C와는 그렇게 이별했다.

이틀정도 마음을 추스른 뒤 그에게 문자 한 통을 남겼다. 

'핸드폰은 무료폰이니 공기계는 쓰려면 너 써. 요금제는 해지할 거라 이제 연락은 안 될 거야.' 

그리고는 쓸쓸한 마음으로 대리점으로 가서 그와의 마지막 연결고리일지도 모를 핸드폰을 해지하면서 나왔다. 


나의 연애사를 아는 H는 나를 보면 항상 안타까워한다.

"어이구.. 진짜 넌 언제 제대로 연애할 거니." 

내 남자를 보는 눈이 후졌던 걸 어쩌겠는가. 

이렇게 또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보고 알게 되는 거지.. 


C와의 연애를 통해 깨달은 점은 2가지 

잘 생긴 사람은 진짜 웃기만 해도 화가 풀린다.

남자에게 너무 헌신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또 나의 나쁜 놈이 하나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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