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나이 마흔에 아이를 낳을 줄은 몰랐다.
사실 나는 언제나 빨리 결혼해서 아이는 넷 정도 낳는 다복한 가정을 꿈꿨다.
하지만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결혼도 늦게 했으면서 아이를 바로 가질 생각은 없었고, 둘만의 자유로운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이 마흔을 최종적인 한계 나이로 잡고, 나이 마흔에 아이를 낳거나 임신 중이 아니라면 깨끗이 포기하기로 했었다.
그리고 마흔이 되던 해, 나는 임신을 했다.
하지만 그때 난 너무 갑작스러웠다. 그렇게 덜컥, 임신이 될 줄은 몰랐다. 둘 다 나이가 있으니...
그래서 그때 난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고 준비가 안된 것 같다는 생각에 내내 마음이 힘들었다.
그리고 결국 아이를 잃었다.
아무리 초기 유산은 흔한 일이고, 비정상적인 유전자가 만나 수정한 운 나쁜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심장 소리까지 들었던 아이를 잃은 건 결국 내가 마음을 편히 가지지 않아 생긴 거라는 죄책감에 휩싸이게 했다.
몇 날 며칠,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지만 마음 한편에 내가 울 자격이 있는 건가 끊임없이 반문했고, 내가 미웠다.
그렇게 아픈 마음을 끌어안고 1년이 지나, 나는 다시 임신을 했다.
한 번의 큰 교훈 덕분인지, 다시 임신을 하고는 어느 때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1년 전과 똑같은 상황임에도 그때와 내 마음은 정반대였다. 모든 것에 감사했고, 모든 일상이 행복했다. 아이와 함께 할 세 식구의 미래가 기대되었고, 어떻게 살아갈지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렇게 편안한 상황에서 아이가 태어났고, 병원과 조리원, 산후도우미님의 도움으로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모든 게 서툴렀지만, 아이는 그럭저럭 무탈했고 체력적으로는 조금 힘들어도 남편과 셋이 즐거웠다. 아이가 울어도 예뻤고, 꼼지락거리는 발가락만 봐도 행복했다. 어떤 이들은 100일의 기적을 기다린다는데, 푹 못 자는 고통은 있어도 기적을 기다릴 만큼 힘든 부분도 없었다.
그렇게 100일이 지나고, 4개월이 된 무렵부터 아이는 알 수 없는 짜증과 울음이 늘어났다. 늦은 오후만 되면 아이는 우유를 먹다 말고 울기도 했고, 악을 쓰며 우는 날도 늘어났다.
일명 마녀의 시간이라고들 했다.
점점 바닥으로 치닫는 체력에 말도 못 알아들을 아이에게 큰 소리를 내기도, 같이 울어버리는 날이 늘어났다.
나를 보며 웃는 아이를 보면 행복했지만, 악을 쓰며 우는 아이는 정말 버거웠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육아 공부에 너무 소홀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반복하던 어느 날, 우는 아이를 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나이에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아이를 낳은 거지?’
한 번의 유산으로 뼈저리게 느꼈던 소중함을, 고작 어린 아가의 (물론 참기 힘든 아이의) 울음소리에 잊어버리다니. 다시 아이가 우리에게 온다면, 힘들어도 기쁜 마음으로 함께하겠다고 기도할 때는 언제고, 40년을 살아오며 키워온 인내심이라는 내공은 어디다 버려둔 걸까, 자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미안하다는 말을 마음으로 수백 번, 수천번 되뇌었다.
그래서, 지금은 좀 괜찮아졌을까?
아쉽게도, 여전히, 6개월 차에 접어드는 아이와 나는 매일같이 같은 상황을 반복하는 중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또한 언젠가는 그리워지리라.
그 마음으로 매일매일 내 마음을 다스려보지만, 정말 쉽지만은 않은 하루하루가 매일같이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