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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Aug 04. 2024

수박도 양보할 수 있는,  

남편에게는 양보하기 아깝지만... 

“나 며칠 전에 라면 먹다가 울었잖아.”

작년이었던가,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기 직전의 어느 초여름날, T 언니와 R 언니랑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던 중 뜬금없이 T 언니가 고백하듯 말했다. 고백에 앞서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각자의 남자친구 혹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던 것 같다. 


".... 라면 먹다가 울었다고?"

".... 왜?"

우리는 T언니가 라면을 먹다 울었다는 말에 눈이 동그래져 이유를 물었다. 

“아니, 저녁에 이런저런 이야기하면서 라면을 먹었거든. 잠깐 한눈 판 사이에 내가 다 먹은 줄 알고 C 씨가 남은 걸 다 먹어버린 거야. 왜 갑자기 그걸 보는 순간 눈물이 그렇게 나니? 정말 말 그대로 펑펑 울었어.” 

(여기서 C 씨는 T언니의 오래된 남자친구다.)


우리는 그 말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을 지으며 “아, 그래 이해된다.”라고 대꾸했다.

그리고 나도 고백하듯 말했다.

“우린 저녁에 티브이 보다가 남편이 과일 먹자고 들고 올 때가 있거든? 귤 같은 거야 각자 까먹으면 되는데 깎아놓은 과일을 가지고 올 때는 꼭 포크를 하나만 가져온다? 포크 하나로 자기 한 입 나 한 입 하자고 하는 건데 - 설거지거리 하나라도 줄이자고. 그런데 뭐 하나 씻나 두 개 씻나 뭐가 그렇게 차이가 난다고. 안 그래? - 암튼 문제는 티브이를 보면서 먹어서 그런가 꼭 자기는 두 세입 먹고 나는 한입 주고 그래. 다른 때는 뭐 그냥 그러려니 하는데, 수박을 그렇게 줄 때는 진짜 짜증 나. 그래서 몇 번 소리 질렀었던 적 있어.”


그러자 우리 중에 제일 야무진 R언니가 격하게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난 접시에 반반 똑같이 담아놔. 확실히 남자들이 배가 커서 그런지 많이 먹으니까 먹는 거 앞에서 맘 상할 때 있더라고. 그래서 언젠가부터 똑같이 나눠서 각자 접시 꺼만 먹기로 했잖아.”

T 언니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우리 중에 제일 똑똑해, 라며 칭찬했다.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말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 입에 맛있는 음식이 들어가는 걸 보는 거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의미이다. 주로 자식 입에 들어가는 걸 볼 때면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까 싶다. 나는 당연히 남편을 사랑하고, 그렇게 사랑하는 남편이 내가 해 준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무척 만족스럽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남편이 맛있게 먹으면 한 입이라도 더 주고 싶어 진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수박은 나보다 더 많이 먹으면 화가 난다. 결혼 전 집에서는 수박을 먹는 사람은 주로 나뿐이었다. 아빠도 수박을 좋아하시긴 했지만, 집에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나보다 적으시니 수박은 거의 내 차지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 남편이 나만큼이나 수박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먹는 일이 생긴다. 그걸 그냥 기분 다른 때처럼 좋게, 행복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내 것을 빼앗긴 기분이다. 

남편은 그런 나에게 항상 "아깝냐?" 하며 기분 상한 듯 장난을 치고, 나는 똑같이 장난치듯 "응!!" 하고 강한 어조로 대답을 하며 서로 웃고는 한다. 

그런데 여기서 고백하건대, 수박은 좀... 아깝다. 


남편의 표현대로 나는 식탐 대신 '수(박) 탐'을 가지고 태어났나 보다. 




얼마 전 아이가 태어났다. 

4-5개월 무렵 손을 빨기 시작하고 이앓이에 힘들어 하자 제일 먼저 산 치발기가 수박모양이었다. 꽤 큰 사이즈라 아이가 잘 가지고 놀까 싶었는데, 웬걸, 작은 사이즈의 바나나, 키위 등의 치발기보다 훨씬 더 잘 가지고 논다. 심지어 정말 수박을 먹는 것처럼 입에 넣는 모습을 볼 때면 "역시, 내 아들답군!"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리고 얼마 전 생후 6개월이 시작되면서부터 이유식을 시작했다. 과일은 당도가 높아서 제일 마지막 단계에 먹이라는 조언에 따라 아직 과일을 맛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조만간 여름이 다 가기 전, 수박을 조금 맛 보여줘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 생각만 하면 벌써부터 설렌다. 나처럼 그리고 남편처럼 수박킬러 아들이 되어줄까?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아이가 나보다 수박을 더 많이 먹어도 하나도 서운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평생 수박을 못 먹어야 아들이 수박을 먹을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규칙이 생긴다면 기꺼이 수박을 포기하고 아이에게 수박을 양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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