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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쏭쏭 Mar 03. 2024

막탄공항, 분실물 센터를 가다.

필리핀 세부에서 휴대폰 잃어버린 썰, 풉니다.

때는 23년 11월. 회사 사정으로 사용하지 못한 연차가 누적되어 있었던  나는 이 연차로 여행을 다녀올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오빠가 이번에 함께 여행을 가는 게 어떻냐고 제안을 했다.


시간 되면 밥 한 끼 먹자, 식으로 여행도 같이 가고 하면 좋지,라고 몇 번 말은 주고받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뒤 오빠는 별 다른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대로 잊히나 했다.


"그래서 새언니랑 날짜는 잡았어?"


그래서 오빠가 이렇게 물었을 때는 정말로 당황했다.  사실 나는 이 부부와 함께 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나는 혼자서만 여행해 봤기 때문이다. 나는 예민하고 눈치도 많이 보는 편인데... 걱정을 안고 언니와 통화를 나눴다. 그러나 그런 막연한 걱정보다 우리를 현실적으로 주저하게 하는 것은 코로나 이후 급격하게 상승한 여행 물가였다. 특히나 갑자기 잡으려 해서 인지 가격이 더욱 비쌌다! 코로나 이전의 비행기표값만 알고 있는 나로서는 기함할 노릇. 알뜰한 새언니도 비행기 표를 납득하기 어려워했다. 그럼 저희 생각해 봐요. 호호.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되고 자연스럽게 가지 말자-로 대화가 끝나는가 했는데


"뭐라는 거야! 이때 아니면 언제 갈지도 모른다고! 일단, 내가 비행기표 예약한다."


오빠가 득달같이 연락이 왔다. 결국 새언니가 12월,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아, 진짜 가는구나.


여행은 처음부터 순탈 하지 않았다. 이 여행이야기를 풀기 시작하면 끝이 없지만, 오늘 여기서 풀고자 하는 것은 내가 휴대폰을 잃어버렸던 일이다.


필리핀을 여행하는 사람은 엄청 많겠지. 하지만 막탄 공항 분실물 센터를 가서 조서를 써 본 사람은 나 하나뿐일 것이다.


나는 원래 정신이 좀 없는 편이다. 게다가 물건에 대한 애착도 없는 편. 그러다 보니 어린 시절에는 도시락 가방과 우산을, 커서는 자취방 열쇠와 카드를 그렇게 잃어버리고 다녔다. 대학교 시절, 친구와 2박 3일로 내 인생 첫 여행을 떠난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거의 2시간 간격으로 내 카드를 찾아 헤맸다. (물론 카드는 대부분 내 가방 안에 있다. 내 가방이 정리가 안되어서 못 찾을 뿐). 그러나 휴대폰을 잃어버린 건 처음이었다! 한국에서도 잃어버린 적 없는 휴대폰을 내가 외국에서 잃어버릴 줄이야! 그것도 혼자 온 여행이 아니고, 생에 처음으로 가족들과 온 여행에서!


휴대폰을 분실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택시 안이었다. 필리핀의 '모알보알'이라는 곳이 우리의 여행의 목적지였다. 그곳을 가기 위해 우리는 원래 막탄 공항에서 남부터미널로 가서 버스를 타고 이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예정이 바뀐 것은 남부 버스터미널 앞에서 만난 호객꾼(!) 때문이었다. 그에게 낚인, 정확히는 그의 합리적인 제안에 수긍한 우리는, 버스비 정도를 지불하고 택시를 타게 된다.


우리는 원래 모알보알까지만 가기로 하고 택시를 탔는데, 생각해 보니 새벽에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내리는 건 몹시 위험한 일 같았다. 나는 그래서 택시 기사에게 혹시 호텔까지 데려다줄 수 있냐고 물었고, 그는 그렇게 해주겠다고 했다. 고마워! 내 감사의 인사에 그는 호텔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물론 알려줄 수 있죠! 잠시만요!"


한국에서 유심을 사면 비싸고, 현지 공항에서 사면  줄이 길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후기를 본 우리는 한국에서 미리 2개의 유심만 샀다. 그 유심은 나와 새언니의 폰에 장착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유심을 바꾸지 못한 상황. 그러나 걱정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미리 호텔 주소를 캡처해 뒀기 때문이다. 후후! 나는 휴대폰을 꺼내려 호주머니를 뒤졌다. 그런데 휴대폰이 만져지지 않았다. 음? 어디 있지? 아무리 뒤져도 휴대폰이 나오지 않았다.


아, 메고 있던 가방에 넣어뒀나?


택시를 타면서 중요한 물건을 넣었던 에코백까지 전부 트렁크에 실어버렸다. 아, 그걸 트렁크에 넣다니. 졸다 보니 판단력이 흐려졌나 보다.


"제가 휴대폰을 가방 안에 둔 것 같은데요, 혹시 트렁크를 열어도 될까요?"

"물론이요!"


그가 차를 세우고 트렁크 문을 열었다. 나는 뒤로 가서 가방을 뒤졌다. 그런데.... 없다? 가방을 트렁크에 쏟아보았지만 나오는 거라곤 목베개와 메모지, 멀미약 같은 지금으로선 조금도 쓸데없는 것들 뿐이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파악한 오빠가 소리쳤다.


“왜? 무슨 일인데?”

“핸드폰이 없어.”

“.... 뭐?”


오빠의 목소리에 당황스러움이 역력하다. 나도 당황스럽거든? 그러나 옷, 가방 아무리 뒤져도 휴대폰이 없었다. 택시기사도 내렸다. 그는 내가 앉아 있던 좌석 아래까지 뒤지며 찾아보았다. 그러나 휴대폰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아, 진짜 잃어버렸나? 정말? 진짜?


내 휴대폰은 자급제 폰이긴 하지만 그래도 40만 원 넘게 주고 산, 1년도 안 된 새것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세부 비행기 표값으로 한 사람당 60만 원 가까이를 지불했다. 이 상황에서 폰까지 잃어버리면 도대체 이번 여행에 얼마를 날리는 거지? 괜히 왔나? 아, 그런데 폰에 별 거 다 들어 있는데? 통신사가 자동로밍 되었던가? 설마 해킹당하거나 범죄에 이용당하는 건 아니겠지? 생각할수록 안 좋은 생각만 났다. 아, 통신사에 분실신고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씨, 그런데 분실신고를 하려고 해도 핸드폰이 필요하잖아! 머리가 온갖 생각으로 뒤엉켰다. 오빠가 답답해하며 말했다.


“아니, 휴대폰을 어쩐 거야?”

“모르지. 아, 혹시 화이트 택시에서 졸면서 떨어뜨렸나?”


화이트 택시는 공항에서 남부 터미널까지 이동하면서 탔던 택시의 종류다.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나는 그때도 정신없이 졸았다. 그때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의 대화를 듣던 택시기사가 물었다.


“혹시 택시 탈 때 뭐 쪽지 같은 거 받은 거 없어요?”


쪽지? 뭔 쪽지?라고 말하려는 순간, 오빠가 쪽지를 꺼내 들었다! 아니, 저걸 언제 받은 거야? 그러는 사이, 택시 기사는 오빠가 내민 쪽지를 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내용은 대충 휴대폰을 잃어버린 불쌍한 여행객에 대한 내용이었다. 제발! 제발! 그러나 내 간절한 마음과 달리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 아!! 머리에서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아까! 택시에 가스 넣을 때! 플리스 꺼냈잖아! 그때 호주머니에서 빠진 거 아닐까?”


중간에 택시 기사는 차에 가스를 넣어야  한다며, 잠시 주유소에 들렀었다. 나는 그때 따라 내려서 트렁크에 넣었던  플리스를 꺼내 다시 입었다. 그 플리스의 호주머니를 지금껏 내가 뒤지고 있었던 거고.


“가스 주유소 말하는 거예요? ”

“네! 아마 거기서 떨어뜨렸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내 말에 택시 기사가 가스 주유소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거기도 없다는 대답이 들었다. 아... 머리가 멍해졌다. 그때였다.


“받았다!”


새언니가 외쳤다. 네? 깜짝  놀란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 언니를 보았다. 언니가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혹시나 몰라서 바로 로밍해서 너한테 계속 전화했거든? 계속 안 받더니 지금 받았어!”


그러나 들려오는 말은 현란한 따갈로그어! 우리는 황급히 휴대폰을 택시 기사에게 넘겼다. 택시 기사가 전화를 대신했다. 한참 대화를 한 후, 그가 전화를 끊고 말했다.


“걱정 마세요. 공항에 있대요.”

“공항이요?”


그게 왜 거기 있어? 내가 공항에서 휴대폰을 꺼낸 적이 있었나?


“공항에서 주워서 거기 경찰에 맡겨뒀대요.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어찌 되었건 진짜 너무 다행이었다. 진짜 십년감수했다. 나는 연신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괜찮다고 했고, 결국 우리는 그의 휴대폰을 이용해 숙소를 검색했다. 비슷한 이름이 두 개가 검색되어서 헷갈렸는데, 언니가 제대로 된 것을 골라주었다. 흑흑 정말 다행이었다.


휴대폰이 안전한 곳에 있다는 걸 확인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휴대폰이 없어서 아쉬운 것은 사진을 찍지 못한다는 것뿐이었다. 휴대폰이 없으니 인터넷도 하지 않고, 한국 사람들과 전혀 연락이 되지 않으니 도리어 심리적으로 완전하게 차단되어 여행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여행 마지막날. 공항 도착 전, 말끔하게 샤워하고 뽀송한 새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가 공항에 도착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내 휴대폰을 찾는 일이었다. 나는 지나가는 공항직원(추정)에게 혹시 분실물센터가 어디 있냐고 물었다. 분실물센터가 영어로 생각나지 않아서 급히 오빠 휴대폰으로 검색해야 했다. 분실물센터는 영어로 lost and found다. 잊지 말자. lost and found. 그러자 그는 내게 어둠 속 보이지도 않는 어딘가를 가리키며 저기로 가보라고 했다.


"저렇게 멀리?"


너무 먼데? 나는 조금 아득한 기분이 되었다. 아예 공항을 빠져나가서 다른 건물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환한 건물을 빠져나가 어두운 길을 지나 보이지도 않는 건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은 내게 약간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모든 것은 내가 저지른 일. 나는 오빠와 언니에게 다녀올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그러자 언니가 말했다.


"그런데 택시 기사가 '경찰'에게 맡겼다고 하지 않았어요? 경찰서를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 아?"


그게 그렇게 되나? 나는 당연히 잃어버렸으니까 분실물 센터라고 생각했지! 예상지도 않은 지적에 나는 당황했다. 그때 택시 기사에게 좀 더 자세히  물어볼걸! 경찰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냥 공항 분실물이니까 분실물 센터지! 하고 가볍게 생각했었다. 나는 항상 이렇게 너무 많은 것을 생략하고 내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나는 이렇게 나 자신을 욕하며 공항직원(추정)들에게 경찰서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들이 이유를 묻는다. 나는 휴대폰을 잃어버렸고, 택시 기사가 경찰에게 맡겼다고 한 것을 설명했다. 그러나 영어가 짧아서 그런지 대화가 잘 되지 않았다. 우리에게 잠시 기다려보라고 하고 사라진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도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 시간은 넉넉하게 남아 있었지만 마음이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일단, 두 사람은 그럼 여기 있어봐. 내가 일단 분실물 센터를 가볼게!"

"뭐? 야, 같이 움직여야지!"

"아니야. 갔는데 아니면 모두 고생하는 거잖아. 일단 두 사람은 여기서 아까 그 사람들 오는지 보고 있어. 정말로 경찰서가 밖에 있는 건 아니겠지."

"엇갈리면 안 되니까 빨리 와!"

"알았어!"


문득, 혹시 모르니까 여권을 챙길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나는 무시하고, 왜 나는 이런 본능을  자꾸만 무시하는 걸까?  분실물 센터를 찾아 어둠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무릎이 좋기 때문에 평소에도 절대 슬리퍼를 신지 않는다. 365일 중에 360일은 발목까지 잡아주는 운동화를 주로 신는다. 그런데 여름 나라에 놀러 온다고 나는 지금 슬리퍼 차림이었다. 그것도 밑창이 얇은... 무릎으로 충격이 고스란히 올라오는 느끼면서 나는 넘어지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내 무릎은 끝짱이라고!


"실례합니다. 혹시 분실물 센터가 어딘가요?"


나는 50미터 간격으로 길을 물었다. 늦은 시간, 그들의 일상을 파괴하는 내가 피곤하고 짜증스러울 만도 하건만 그들은 내게 친절하게 방향을 알려주었다. 고맙다고 외치고 나는 뛰고 뛰었다. 사람들은 내게 넘어진다고 조심히 가라고 외쳤고, 나는 그들에게 손을 한 번씩 흔들어주어야 했다. 그렇게 분실물센터가 있는 건물로 왔다.


그런데 건물이 몇 개가 붙어 있었고, 정확한 위치도 알 수 없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고, 사람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무서워서 얼씬도 안 했을 텐데! 나는 청소하시는 분들에게 분실물 센터를 또 물었다. 그러자 그들  중 한 명이 한  건물을 가리켰다.


"저 건물 1층이에요. 2층이 아니고, 1층!"

"감사합니다!"


그런데 1층으로 갔는데 문이 닫혀 있다? 혹시나 싶어서 한 바퀴를 뱅 돌았는데 열려있는 문은 없었다. 흐엉.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나에게 길을 알려준 사람을 다시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또 뛰어서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아 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내가 저 건물 1층은 문이 닫혀 있었다-로 이야기를 끝맺자 그가 말했다.


"분실물 센터는 2층이야."

... 뭐?


결국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거기는 불이 켜져 있었다! 오, 뭔가 희망적이야!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제법 넓은 공간이었지만 분실물 센터라고 하기엔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텅 빈 창고 같은 곳에 캐비닛 두어 개와 책상 두 개가 놓여 있는 것이 전부인, 전반적으로 휑한, 황량한 분위기였다. 그 책상에 남자와 여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혹시 여기가 분실물 센터인가요?"


그러자 남자가 대답했다.


"네."


와, 드디어 도착했다! 나는 거의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꾹 참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가 휴대폰을 며칠 전에 잃어버렸거든요. 이곳에 맡겨뒀다고 해서요. 혹시 휴대폰 분실물 들어온 것이 있을까요?"

"어떻게 생긴 휴대폰이죠?"

"네? 어... 삼성 휴대폰이고, 네모나고, 검은색이고.."


말을 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아니, 휴대폰은 다 똑같이 생겼지! 나는 휴대폰 케이스도 특별한 걸 하지 않았다. 그냥 투명한 실리콘 케이스. 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케이스에 대한 설명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내 말을 듣고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캐비닛에서 휴대폰을 하나 꺼냈다.


"아! 내 휴대폰!"


반가운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는 쉽지 않았다. 내게 휴대폰의 잠금을 풀어보라고 했다. 그거야 쉽지! 휴대폰을 받아 들며 나는 혹시나 휴대폰이 방전되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배터리가 남아 있었다! 사용을 하지 않고 처박아 둬서  배터리 소모량이 적었던  것 같다. 너무 다행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몇 번이나 울렸을 내 휴대폰 알람을 떠올렸다. 새벽 알람 여러 개 맞춰뒀는데... 이 사람들 얼마나 시끄러웠을까? 패턴을 풀지도 못했을 텐데... 괜히 미안해졌다.


급하게 패턴을 풀려고 하니, 실수가 생겼다. 잘못 그어졌던 것이다! 그 순간 얼마나 당혹스럽던지! 그 사이 누군가 휴대폰 패턴을 풀어보려고 했는지, 아마도 알람 소리를 끄기 위해서였겠지, 많이 틀렸기 때문에 20초(맞나?) 후에나 재도전할 수 있다는 멘트가 떴다. 그 20분이  얼마나 길던지! 나는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고 다시 도전했다. 거의 붓글씨를 쓰는 것처럼 섬세하게 움직였고 그 결과 패턴을 풀 수 있었다.


"봤죠? 나 풀었다?"

"그럼 이제 당신 것인걸 증명할 수 있는 걸 보여줘요."

".. 네?"

"사진 같은 거 없어요?"


놀랍게도 나는 셀카를 전혀 찍지 않는다. 여행을 가서 기념할 때나 한두 장 찍지.. 문제는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여행 가면 사진이랑 동영상 엄청 찍을 텐데, 용량이 부족하면 안 되지!'란 생각에 갤러리를 정리하고 왔다는 점이다.


아, 망했네?


어처구니가... 없다? 헛웃음이 터지려는 순간, 입국심사 과정에서 QR이 삭제되었던 일이 떠올랐다. 아, 다사다난하다. 그래! 휴지통!


다행스럽게도 갤러리 휴지통에 몇 년 전, 가족 여행 때 사진이 남아 있었다! 흑흑 진짜 다행이다. 그렇지만 이 사진은 헤어스타일이 다를 때인데. 설마, 나 아니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떨리는 마음으로 가족사진 속, 내 얼굴을 확대해 그에게  보여주었다. 다행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이 휴대폰 가져-"

"그럼 조서 써야 하니까 신분증 주세요."

"... 네?"


아, 이 어려운  남자! 그는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당황스러워졌다. 정신통머리가 이렇다는 이후, 여권은 오빠가 가지고 있었다. 아까 머릿속에서 여권을 떠올렸던 것이 스쳐 지나갔다. 아, 그때 챙기는 건데! 하지만 후회해도 지금은 늦었다.


"제 신분증은 제 가족이 가지고  있어요. 나 비행기 시간이 없어서 그런데, 사진 찍어놓은 거로는 안될까요?"

"안 돼요."


아니! 나 이러다가 비행기 놓친다고? 내 사정 좀 봐주면 안 돼? 내 얼굴은 간절해졌고, 남자는 곤란한 얼굴로 원칙이라고 했다. 아니, 나도 아는데! 이 외국인이 불쌍하지도 않니? 나 패턴도 불고, 사진도 보여줬잖아? 서류에 써야 한다면 그냥 내 휴대폰에 꺼 쓰면 안 되겠니? 편의를 조금만 봐주면 안 되겠어? 흐엉, 이거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진상짓인데! 외국까지  와서  내가 이러고 있다니!


"안된다고요! 우리도 보고서를 써야 한다고요! 여권 가져와요! 그렇지 않으면 휴대폰은 못줘요!"


잊고 있던 여자 여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이 왜 그렇게 섭섭하던지... 물론 그들의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자기들도 일이니까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섭섭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요. 그럼 조금만 기다려줘요. 금방 올게요."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흐엉. 진짜 무릎이 너무 걱정스러웠다. 동시에 넘어지면 끝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나를 사로잡았다. 또다시 뛰는 나를  발견한, 나에게 분실물 센터를 알려주었던 사람들이 나를 보고 외쳤다.


"어? 휴대폰 찾았어?"

"찾았어! 그런데 여권 가져오래!"


그들은 울지도 웃지도 못할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아, 나도 딱 그 표정일 텐데! 그리고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오빠와 언니를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당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외쳤다.


"여권 줘!"

"? 휴대폰 찾았어?"

"어. 근데 조서를 써야 한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어서 여권 내놔."

"같이 갈까?"

"아니야. 오빠랑 언니 피곤한데. 여기 있어."

"빨리 갔다 와. 비행기 시간 별로 없어."


이 마지막 말 때문에 나중에 나와 오빠는 조금 말다툼을 했다. 나중에 나는 오빠가 그렇게 말해서 더 마음이 급해졌다고 했고, 오빠는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며 달려오던 내 표정이 너무 어두워서 얼마나 걱정되었는지 아냐고, 마사지받지 말고 그냥 공항으로 올걸 하고 후회했다고 했다. 어느 쪽의  기억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당연히 내가 맞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성격 상 상당히 서두르는 편이기 때문에 뛰어다닌 거지 객관적으로는 시간은 넉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느긋한 성미인 오빠가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정말로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언니는 예전에 비행기 놓친 기억이 있어서 강박도 있다고 했는데! 내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갔다 올게!"


나는 또 뛰었다. 무릎도 걱정되고 무엇보다 발바닥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아, 운동화 가져올걸. 캐녀닝 할 때도 그립던 운동화가 여기서 또 이렇게 그립구나. 또다시 뛰고 있는 나를 보며 필리핀 사람들은 손을 흔들어주었다. 흑흑. 고마워.


"가, 가져왔어요!"


다시 돌아온 분실물 센터. 아이고 죽겠다. 나는 거의 주저앉듯 의자에 앉았다. 그 사이 까칠하던 여자직원은 떠나고 없고, 남아 있는 것은 남자 직원뿐이었다. 나는 문득, 처음부터 그 여자직원이 없었으면 이 휴대폰을 어쩌면 그냥 가져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뭐, 그냥 상상일 뿐.


"이걸 작성하세요."


그가 내게 종이를 내밀었다. 나는 사건보고서 같은 걸 써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짧은 영어로 보고서를 써야 한다니! 그러나 처음 말했던 것과는 달리 내가 해야 하는 것은 종이에 싸인을 하나 하는 것뿐이었다... 에? 이게 끝이야?


"다 썼어요? 그럼 휴대폰 들고 여기를 봐요"


그가 제 핸드폰을 들고 나를 찍으려고 했다. 아마 수령을 확인하는 증거 사진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나는 ㅐ 휴대폰으로 들고 어색한 표정으로 그의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정말 반사적으로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려고 팔을 들었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손을 내렸다. 와, 진짜 버릇이란 무섭다. 이런 상황에서도  브이라니...


"다 끝났습니다."


이렇게 끝나다니! 고맙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걸어 다니는 건데! 애써 마사지까지 받고 깨끗이 씻었는데, 내 몸은 땀범벅에 오랜만의 달리기로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효과가 하나도 없게 생겼다. 뭐, 그래도 좋게 끝난 건 다행이지! 나는 또 달렸다. 걸어도 충분했지만 오빠와 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둘러야 해! 그리고  나는 나를  응원한 길거리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헤이! sir! 나 휴대폰 찾았어!"

"오! 축하해! 굿굿!"


열심히 뛰고 또 물어보고 다닌 까닭에 내가 휴대폰을 되찾을 수 있을지 여부는 분실물 센터로 가는 길에 일하는 공항 직원(추정) 사이에서도 이슈였다. 그들은 내가 휴대폰을  되찾은 것을 본인들 일처럼 기뻐해주었다. 으, 감동! 나는 달리기를 멈추지 지 않고 휴대폰을 다시 찾은  것은 전부 다 너네들 덕분이라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그들도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고.


"휴대폰 찾았어?"


달려오는 나를 보고 오빠가 외친다. 나는 신나게 웃으며 휴대폰을 흔들어보았다. 그런 나를 보고  오빠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시간 없어. 빨리 가자."

"어!"


그렇게 나는 공항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도 몇 가지 작은 사건사고들이 있었지만 그건 여이서 할 이야기가 아니고. 그리고 비행기 탑승시간은 아주 많이 남아 있어서 우리는 공항에서 엄청나게 지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며칠 만에 되찾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이 휴대폰에 필리핀 사진은 단 한 장도 없다. 하지만 내 머릿속엔 필리핀 생각이 잔뜩 쌓여 있다.


종종 인터넷 기사로 한국에 와서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되찾았다는 기사가 뜬다. 그 기사들은 한결같이 외국인이 한국의  친절함과 정직함에 감동했다는 말로 끝이 난다. 그걸  읽을 때는 그저 그렇구나, 좋은  기사네. 하는 심정으로 읽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낯설기만 한 외국. 거기서 만난 친절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된다.


돌아오고 나서, 사람들은 내게 필리핀은 어땠냐며, 사진 찍은 거 있으면 보여주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휴대폰을 잃어버린 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어쩌다 그렇게 된 거냐며 필리핀 이야기를 재촉한다. 그럼 나는 길고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렇게 짧게  정리한다.


"필리핀은 자연도 멋지고, 음식도 맛있었지만, 그중 최고는 단연 사람이야. 필리핀, 진짜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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