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쏭쏭 Apr 29. 2024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돈을 씁니다.

로맨스 스캠.

그날은 창구가 조용했던 날이었다. 손님이 없는 틈을 타서 나는 그동안 바빠서 처리하지 못하고 미뤄두었던 일을 시작했다. 그때 손님 한 분이 영업점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오셨어요?”

“일을 보려고 온 건 아니고…. 이걸 어디다 물어봐야 할 건지 모르겠는데.”     


대답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손님은 곧 대부계 앞에 섰다. 대부계 손님인가? 밀린 일이 산더미였던 나는 내심 반갑기까지 했다.     


“무슨 일이시죠?”     


키스킨이 없는 까닭에 내 키보드는 무척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 타닥타닥 시끄러운 소리 사이로 드문드문 대부계 직원과 손님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돈을 보내려고 하는 이름이 어쩌고, 하는 내용에 귀가 쫑긋 섰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손은 점점 느려지고, 내 관심은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두서없는 대화였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대화를 나누고 있던 대부계 직원의 표정도 점점 이상해져 가고 있었다.     


대충 외국에 있는 지인을 위해서 돈을 보낸다는 듯했다. 직원이 물었다.     


“제가 보기엔 좀 이상한 것 같은데, 혹시 외국에 아는 분 있으세요?”

“네. 있어요.”     


손님의 단호한 대답에 대부계 직원의 얼굴이 당황스러워졌다.     


“.... 있으시다고요? 돈 받을 만한 사람이 있다고요? 돈 보낼 일도 있고?”

“네!”

“잠시만요!”     


결국, 나는 끼어들고 말았다. 두 사람이 나를 보았다.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서류가 눈에 들어왔지만, 어휴, 나중에 해야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객님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시면 저랑 이야기 좀 나누실까요?”

“좋아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막내에게 창구를 좀 봐달라 부탁하고 고객님과 함께 고객용 테이블로 이동했다.     


“제가 옆에서 대충 듣긴 했는데 제대로 듣진 못해서요. 괜찮으시면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를 해주시겠어요?”

“물론이죠!”     


아주 다행스럽게도 손님은 이야기에 적극적이었다. 그런 것과는 별개로 이야기는 굉장히 두서가 없어서 이해하는 데 큰 노력이 필요했다.      


두서없는 이야기를 요약해 보면 이랬다. 고객님은 초등학교 동창회 밴드에 가입했고, 거기에서 A 씨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A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현재 미국의 육군 대위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 발발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에 파병된 상태.      


“죄송한데, 혹시 괜찮으시면 제가 그 카톡을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보세요!”     


고객님이 적극적으로 휴대전화를 보여주었다. 덕분에 나는 어려움 없이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와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머릿속에 스치는 단어가 있었다. 하아, 나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고 말을 이었다.     


“그럼 이 분(A)이 돈을 보내달라고 한 거예요?”

“아뇨! 그는 돈을 보내라고 한 적이 없어요.”

“... 네?”     


아니, 그러면 돈을 왜 보내시는 거예요? 그러자 카톡의 여러 사진 중 하나를 내게 보여주었다.     


“이것 보세요. 다쳐서 피가 나는 거. 너무 위험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근무지 이동을 할 수 없냐고 하니까, 자기는 방법이 없고, 군대 본부랑 이야기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메일도 한 번도 안 써본 제가 이렇게 메일까지 가입해서 연락을 취했어요.”     


이번에는 주고받은 메일을 보여주었다.     


“다른 지역으로 가려면 이동비(미국 육군 교체 비용)가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미국이라서 달러로 요청하더라고요. 그래서 한화로 바꿔서 결제하기로 했죠. 그런데 돈을 보내려고 계좌를 받고 보니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떤 점이 이상하셨어요?”

“군대 본부로 보내는 돈인데, 여기 받는 사람 통장 이름이 개인이더라고요.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고객님!!”

“?”

“너무 훌륭하세요!!”

“... 네?”     


고객님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손님만 아니면(아, 그러면 만날 일도 없었겠지만) 얼싸안고, 하이파이브를 함께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경우는 전형적인 로맨스 스캠 사건이다.      


로맨스 스캠이랑 로맨스와 사기를 뜻하는 스캠을 합쳐 만든 단어로, 말 그대로 사랑의 감정을 이용한 사기라고 보면 된다. 주로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사람과 친분(주로 로맨틱한 감정)을 쌓고, 그 감정을 이용해서 사기를 치는 수법이다. 친분을 이용한 사기인 만큼, 두 사람이 형성한 관계는 대게 매우 돈독하다. 그러니까 의심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 분은 의심을 했고, 이렇게 문의를 했다는 점에서 너무나 다행이었다.     


나는 손님에게 이것이 사기임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고객님은 의심을 가진 것과는 별개로 A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워했다. 내가 말을 이어갈 때마다 손님은 두 사람이 얼마나 친밀한 사이인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이야기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한지, 로맨스 스캠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그런가?’하고 넘어갈 정도였다.     


“여기 이렇게 사진도 보냈어요!, 자기 딸 사진도 보여줬고. 자기 딸이 k-pop 팬이라고, 한국 가는 걸 정말 기대하고 있다고도 했고. 여기 대통령에게 표창받은 사진도 보냈고….”     


손님은 두 사람의 돈독한 관계의 증거로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가 봤을 때는 이 사진들은 다 합성 같아요.”

“네?”     


합성이라는 단어에 손님이 당황했다. 그는 절대 자기 눈에는 절대 합성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 사진이 가짜가 아니라고? 오바마 대통령에서 표창을 받는 사진이? 티브이에 자신이 나오는 사진이? 어째서 이토록 가짜 티가 나는 사진이 누군가에겐 진짜처럼 보이는 걸까?      


나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다시 한번 이것이 최근 유행하는 사기의 패턴이며, 얼마 전 당했던 분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데도 손님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듯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이해 못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혼자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영역에 도달했음을 느낀 나는 조심스럽게 손님에게 말했다.     


“혹시 제 말보다 경찰을 불러서 이야기를 들으시면 좀 더 마음이 가실까요?”

“좋죠.”

“그럼 제가 경찰을 부를게요. 그런데 혹시 A에게 개인정보 같은 건 보내신 적 없죠?”

“.... 주민등록증을 찍어서 보내긴 했는데….”

“네에?! 그럼 일단 주민등록증 분실신고부터 하세요. 혹시나 그걸로 나쁘게 쓸 수도 있으니까요. 경찰 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리니까 그사이 관공서 가셔서 분실신고하시고 오시겠어요? 그리고 괜찮으시면 휴대전화는 제가 좀 들고 있을게요.”     


A는 그사이에도 계속 고객님에게 카톡을 보내는 중이었다. 카톡이 한번 올 때마다 고객님의 얼굴에 온갖 감정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 상황에서 고객님과 A가 단둘이 (아무리 휴대전화를 통해서라고 해도) 대화하는 것은 좋을 것 같지 않았다. 괜히 마음이라도 흔들리면 정말로 큰일이었다. 다행히 손님은 내 제안에 수긍하며 면사무소로 갔고, 나는 경찰을 불렀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경찰이 왔다. 나는 고객님이 돌아올 때까지, 지금까지 나눴던 이야기를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곧 고객님이 돌아왔고, 나는 고객님과 경찰들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주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밀린 일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그 사이 손님들도 잔뜩 밀려 있었다. 나는 열심히 손님들을 응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얼굴도 한번 보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그 큰돈을 보내주려고 했다고요?”     


경찰들과 손님이 앉아 있는 곳은 열려 있는 곳이어서 경찰의 어처구니없어하는 목소리가 여실히 들렸다. 그의 요약을 들으니, 아까 대화 중에 내가 ‘아닌가?’하고 의심했던 일이 너무나 멍청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사기를 알아보는 데는 적절한 거리감이 필요하구나.     


관계로 형성된 사기인 만큼, 붙어 있으면 절대 알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 나는 피해자인 고객에게 두 사람의 긴 이야기를 들은 것만으로도 ‘어쩌면 사기가 아닐지도 몰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통해 한번 거쳐서 들은 경찰은 깔끔하게 사건을 정리했다.      


이렇게 떨어져서, 제삼자가 되어 저 이야기를 들으니 ‘저걸 걸 당한다고?’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남의 이야기일 때는 잘 보이는 것이, 내 이야기, 내 가까운 사람의 이야기가 되면 고개를 끄덕이는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보이스피싱이든 사기든, 피해자를 어리석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너무나 믿었던 사람이 예상치 못하게 뒤통수를 쳤다. 정말로 믿고, 사랑했던 사람의 변심. 아니, 배신. 아니지. 사실은 모든 것은 처음부터 다 짜진 판이었어. 연극이었지. 나는 그런 싸구려 연기에 놀아난 거야. 그따위 짓에 놀아나다니!      


멍청한 자신에 대한 좌절감, 나를 배신한 상대에 대한 분노. 그 두 가지가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잠식하게 된다. 사기는 돈도 돈이지만 한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짓밟는다는 점에서 죄질이 매우 나쁘다.      


보통 사기는, 특히 로맨스 스캠은, 외로운 사람이 당한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 말은 누구든 사기에 노출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게 글을 쓰는 나도 사기에 당할 수도 있겠지. 


오늘날 인간관계의 폭은 나날이 넓어지고, 사기꾼을 만날 가능성은 점점 더 커진다.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사기꾼을 피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피해야 할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그건 너무 힘든 일이다. 게다가 사람을 피할수록 외로워지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순서다. 그건 결국 또 사기를 불러온다.      


그럼 사기를 피하는 방법은 없을까?     


없진 않다. 일단, 로맨스 스캠의 경우, 감정의 발전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특징이 있다. 겨우 한두 달 연락했는데, 그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든다고? 그럼 그가 준 정보 외에 스스로 파악한 정보로 그를 알아본다. (그가 만약 자신을 미국인으로 소개했다면? 그가 나에게 연락하는 시간은 미국 시각으로 몇 시일까? 시차가 있을 텐데?)     


이렇게 저렇게 교차로 검증해 보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특히 인터넷으로 만난 사람의 경우는 특히. 무엇보다 나는 상식적으로 상대방과 나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관계의 위험성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우연히 잘생기고 예쁘고 젊고 돈 많은 사람이 나에게 갑자기 호감을 보인다? (내가 정말 그런 호감을 받을 만한 사람일까 생각해 본다. 40대인 내게 정상적인 20대가 관심을 표할 리가?)

대박이 확실한 정보를 나에게만 준다고? (과연 나라면 그런 정보가 있을 때 남에게 줄까 생각해 본다. 그런 정보라면 남 주기보다 솔직히 내가 이용하지 않을까?)     


그런 일은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드라마 같은 일이 내게 일어나길 기도하기보다 스스로를 제대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법, 평범한 나를 사랑하는 법, 타인의 사랑이 아닌 자기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단단한 나라면 사기꾼도 건드릴 수 없고, 혹시나 사기를 경험한다고 해도 견뎌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꾼들은 다 나가 죽었으면 좋겠다.     



추신. 로맨스 스캠은 전기통신금융사기에 해당하지 않음으로 은행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티슈 두 장에 사치하는 여자가 되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