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시나리오
내 이름은 김은희다. 유명한 드라마 작가의 이름과 같다. 구미시에 있는 모학교의 도서관 사서로 15년째 근무중이다.
우연하게 구미시 홈페이지에 2주만에 영화 만들기 수업이라는 강좌의 소개글이 올라왔다. 2주만에 영화 만들기를 배운다…
작년에 부산 영화제에 시민 영화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여러 영화들을 볼 수 있었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앞에 나와서 자신의 영화를 설명하는 감독들을 보면서 신기하기도 하고 멋져 보였다. 물론 걔중에는 저런 영화라면 나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도 있었다. 저런 영화를 관객에게 보여주면서 저렇게 당당할 수 있다니… 분한 마음도 들었다. 내 시간과 표 값을 돌려달라고.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여러 종류의 작법서를 구입했다. 일렬로 쭈욱 늘어선 작법서를 보면서 빠진 작법서가 있는 지 살펴보고 비어있는 것을 구입했다. 물론, 나는 그 작법서를 한 권도 보지 않았다. 나는 글을 쓸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좋은 작가가 될 사람들을 위해서 전국에서 우리 도서관에 가장 많은 작법책이 있는 것 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절판이 된 책은 사비를 들여서 열 배 가까운 가격으로 구입해서 책장 한 켠에 두었다. 그러나, 일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그 책을 빌려가는 사람은 없었다.
강좌의 소개 글을 읽었다.
강좌는 무료다. 무료라는 글을 보는 순간 이내 흥미가 사라졌다.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좋은 강의를 듣고 싶다.
나는 한 달에 대략 40여만원을 콘텐츠를 소비하는 데 쓴다.
넷플릭스, 디즈니, 애플티비, 쿠팡, 왓챠, 티빙, 웨이브, 유튜브 프리미엄 모두 가입해있다.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웹툰, 웹소설, 비엘 드라마 모든 것을 보고 있다.
창을 닫으려는 데 강사 소개가 보인다.
박경목 감독
<말임씨를 부탁해> 각본, 연출,
한국영화아카데미 16기
<사랑의 확신> 각본, 연출 (유튜브 2300만 뷰) 가 눈에 띈다.
말임씨를 부탁해…처음 들어보는 영화다.
검색을 해본다. 김영옥씨가 나오는 영화다.
예고편을 검색해서 봤다. 코믹하게 보이고 엄마와 내 이야기 같은 영화처럼 보인다.
뻔하게 보였다. 내가 매일 겪고 있는 일을 왜 또 영화를 통해서 봐야하지?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
40 넘어서 왜 시집 안가냐고 전화 할 때 마다 난리다. 아기를 가지려면 지금이라도 결혼을 해야 한다고 난리다. 결혼 생각도 없는 데 왠 아기?
나는 지금이 만족스럽다. 엄마도 이제는 더 이상 기대없이 서로 잘 지내면 좋을 건데 왜 자꾸 불편하게 이러는지 모르겠다. 엄마 때야 몰라도 나는 지금 이렇게 죽 살다가 보면 노년에는 연금 받으면서 편안하게 살 수 있다. 남자가 생기면 새로운 변수가 생기게 된다. 귀찮다.
퇴근하면서 김은숙의 드라마를 다시 봤다. 더 글로리는 잔인할 것 같아서 태양의 후예를 다시 봤다. 세 번째 보고나니 더 이상 보고 싶지는 않았다. 유튜브를 보는 데 추천작으로 <사랑의 확신>이 떴다. 박경목 감독 작품이라고 나와 있었다.
클릭해서 들어갔더니 60분 짜리다. 아무 생각없이 보기 시작했다. 작은 규모의 영화인데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마지막 노래가 좋았고, 남자 배우의 연기가 좋았다. 정성일. 검색을 해보니 더 글로리의 남자 배우라고 뜬다.
티빙에서 <말임씨를 부탁해> 를 봤다. 역시 뻔한 영화 였다. 그래도 끝까지 볼 수 있었고, 살짝 눈물도 났다. 자존심 상했다. 다시 게시판에 들어갔다.
커리큘럼이 있었다.
1회 - 시나리오
2회 - 연기
3회 - 연출 및 촬영
4회 - 시사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기하고, 연출하고 촬영하는 것을 배웁니다. 라고 적혀있다.
할 수 있을까? 연기까지? 살짝 흥미가 생겼다. 연기까지 내가 직접한다고. 연기는 부끄럽지만 해보고 싶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누가 등떠밀면 하겠지만, 손 들고는 못하겠다.
4회 모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만 선발한다고 했다. 무료강좌인 대신에 열심히 할 사람만 뽑는다고.
뭐 재미없어서 빠지면 지들이 어떡하겠냐? 집으로 찾아와서 돈 받을 거야?
하는 마음으로 신청했다.
금요일 저녁. 7시에 첫 수업 시작.
5분 정도 일찍 도착해서 강의실에 들어갔다.
박경목 감독으로 보이는 사람이 노트북으로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였고, 배가 많이 나와 있었다. 운동부족, 지방비만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나는 제일 뒷 자리 구석에 앉았다. 출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 여차하면 뛰쳐나갈 생각이었다.
시간이 되자 다른 사람들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60대 할아버지, 고운 차림을 한 60대 여자 분, 한량 같아 보이는 50대 후반 아저씨, 깡말라 보이는 50대 여자 한 명과 통통하 여자 50대 여자 한 명, 나를 포함한 40대 후반의 여자 2명. 열 명이 정원이라고 했는데 열 명도 채우지 못했나 보다.
운영진으로 보이는 사람이 박감독을 소개했다.
박감독은 약장수 같이 말을 했다.
“제가 학생들 그룹과 다른 교수님들 그룹을 대상으로 모두 4회짜리 수업을 해봤습니다. 4회 만에 모두 자신이 대본을 쓰고, 연기하고, 촬영하고 연출해서 한 편씩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
서울 말을 쓰는 데 아직 대구 사투리가 남아 있었다. 약장수 같으니. 어디서 약을 팔아.
“요즘은 누구나 핸드폰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 영화를 시작할 때는 16미리 필름으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카메라도 1억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핸드폰이 제가 그때 썼던 카메라 보다 성능이 더 좋습니다. 카메라를 켜고 찍고 틀면 그게 영화가 됩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어떻게 영화야. 라는 말이 튀어 나올 뻔 했다.
“처음 영화를 찍으라고 하면, 시나리오를 어떻게 써야할지, 어떻게 찍어야 할지도 막막하지만 제일 큰 진입장벽이 편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겁부터 나게 하는 편집 안하고 우리는 한 커트로 영화를 만들 것입니다. 커트가 뭐죠?” 박감독은 주위를 둘러보면 답을 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나는 눈을 피했다. 제일 앞 줄에 머리가 히끗한 할아버지가 바지 춤을 추켜 세우며 손을 들었다. “카뚜. 자른다는 거 아입니까”
“네. 맞습니다. 커트는 자른다는 뜻 입니다. 예전에는 필름으로 찍었기 때문에 카메라를 켰다가 끄면 하나의 필름 덩어리가 생깁니다. 그게 커트 입니다. 핸드폰도 마찬가지 입니다. 카메라를 켜고 끄면 하나의 파일이 생깁니다. 그게 하나의 커트 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커트로 된 영화를 만들 겁니다. 편집은 다음에 찍고 싶은 게 많아지면 그때 다시 배우면 됩니다. 요즘에는 핸드폰에서도 누구나 쉽게 편집을 할 수 있습니다. 모두 유튜브 하시죠?” 모두들 “네” 라고 대답한다.
“유튜브에 보면 편집에 대해서는 잘 나와 있을 거고, 그건 나중에 따로 하겠습니다.”
박감독은 그동안 수강생들이 작업한 한 컷 영화를 두 개 보여 주었다.
하나는, 덩치가 큰 운전을 못하는 남자가 덜덜 떨면서 골목길을 지나서 주차를 하는 과정만을 보여주었다. 계속 중간 중간에 차와 배달 오토바이가 튀어나오고, 뒷 자리에서는 카메라를 찍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잔소리를 하면서 야지를 주고 있었다.
두 번째 영화는 치매에 걸린 60대 여자가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고 딸 인 줄 알고 돈을 송금한다. 그리고 딸에게 연락을 하지만, 딸은 엄마가 사기를 당한 것을 알지만, 엄마에게 화를 내지 않고 엄마에게 자신이 돈을 받은 것 처럼 엄마를 달래는 이야기 였다. 주인공이 다가와서 카메라를 끄는 것으로 8분짜리 영화는 끝났다. 눈물이 났다.
“이게 다 3시간 수업을 듣고 만든 겁니다. 보시면 연기는 투박하고 이상하지만 다 끝까지 긴장을 하면서 볼 수 있죠?” . 모두 그렇다고 답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다 들어보셨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에는 시작-중간-끝 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 시작 이라는 것은 뭘까요?”
나를 보고 있었다. 시작이 뭐긴 뭐야? 시작이지. 근데 이걸 뭐라 말하지?
날 더러 말하라고? 내가 눈을 크게 뜨자 박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겠어요.”
“시작은 앞에 아무 것도 없고 뒤에 내용이 있는 것을 시작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중간은 뭘까요?” 그렇게는 나도 말하겠다.
중간은 앞과 뒤가 있는 것, 끝은 앞은 있는 데 뒤는 없는 것 이라고 하겠지.
박감독도 똑같이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참 실없는 사람이구나. 저런 걸 정의라고.
“스토리는 시작-중간-끝 이 있어야 합니다. 이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많은 경우 시작을 해놓고 끝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궁금함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끝을 못 맺은 겁니다.”
“이번 작업을 하실 때 하나만 기억해두세요.
드라마란 주인공이 000을 하는 데 그게 겁나게 힘들다.
이거 공식처럼 외우세요. 뭐라고요?”
나이가 많이 든 사람들이 초등학생들 처럼 칠판에 적힌 글을 따라 읽었다.
“주인공이 뭘 하려고 해야합니다. 근데 그게 아주 절박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잘 사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잘 사는 사람이 자빠져서 고꾸라져서 망해야 관심이 갑니다.
잘 사는 사람이 쭉 잘 산다. 재미없습니다. 그런 거 안 봅니다.
못 사는 사람이 잘사는 거 조금 재미있습니다.
잘 사는 사람이 못 살게 되었다가 잘 살게 되는 거 재미있습니다.
선생님들의 힘든 것을 끄집어 내서 남들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남들은 선생님들의 그 힘든 것을 보면서 기분 좋아합니다.
남들은 다른 사람이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 수록 기분 좋고
그때 돈과 시간을 들여서 그걸 봅니다.
그러니, 자신의 힘든 사연을 드러내도 좋고, 꾸며서 자기 일 처럼 해도 좋고
힘든 사람이 뭘 하려는 것을 드러내주세요. 각자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으세요?”
게시물에 그런 글도 적혀 있었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이야기거리를 미리 생각해 오세요.’
첫 번째 60대 할아버지에게 박감독이 이름과 하는 일과 어떤 목적으로 오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순간, 억울한 순간이 있는지 물었다.
“제 이름은 강승수 입니다.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혼자서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기술을 좀 배워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
“만들어서 보고 싶은 이야기는 없으세요?” 박감독이 물었다.
“그런 건 없습니다.”
“연기도 직접 하는 건 아시죠?”
“나는 연기 같은 거 안할 건데요?”
“그럼 여기서 얻어가시는 게 별로 없을 거 같은데요.”
강승수나 박감독 둘 다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떠오르지 않으시면, 최근 자신에게 있었던 일 중에 기억에 남는 일, 억울한 일, 간절하게 하고 싶은 일, 속상한 일 이런 걸 떠올려 보세요. 다음 선생님.”
곱게 나이 든 60대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소진 이라고 합니다. 시를 쓰고 있어요. 시를 쓰다가 보니까 자꾸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져갑니다. 제가 쓴 시가 있는데 들려드려도 될까요?”
“감사합니다만, 시간이 없어서요. 선생님은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싶으세요?”
“저는 아직 특별하게는 없어요. 꽃 영상을 찍고 거기에 음악을 넣고, 제 브이로그를 만들고 싶어요. 감독님께 제 시나 영상을 보여드리고 평가를 듣고 싶어요.”
“선생님은 특별하게 마음 아프거나, 화가 나거나, 억울하거나 남에게 하소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나요?”
“저는 그런 건 없어요.”
“네, 알겠습니다. 다음 선생님.”
“저는 윤순희 입니다. 저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데 시나리오나 영화 만드는 것을 한 번 배워보면 어떨까 해서 왔습니다. 제가 만들어 보고 싶은 것은 휘파람 부는 사람의 이야기 입니다. 휘파람이 너무 불어보고 싶은…”
“좋습니다. 휘파람을 불고 싶은 사람이 있는 데 휘파람을 계속 불어보는 거죠. 근데 이 사람은 왜 휘파람이 불고 싶을까요? 그리고 이 사람은 결국 휘파람을 불게 되나요?”
“아들이 휘파람을 부는 걸 보고 부러웠어요. 그래서 휘파람을 계속 불다가 보니까 어느 순간 불수 있게 되는 걸 생각했어요.”
“시작은 좋습니다. 그런데, 노력하다가 보니 자연스럽게 되었다. 이렇게 하면 극이 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이유가 필요합니다. 무언가를 얻게 될 경우, 무언가를 잃기도 해야 하거든요. 아들이 집을 떠나고 나서야 휘파람을 불 수 있다. 아니면 어떤 낯선 사람을 보고나니 마음이 설레서 휘파람을 불었다. 등등.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게 이야기로서 가치가 생깁니다.”
“저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요.”
“선생님의 선택입니다. 선생님의 뜻대로 하시던지, 이왕이면 이번 수업 동안의 저의 코칭을 받으셔서 한 번 해보시는 거죠.”
“저는 박준철 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은퇴해서 주부를 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회사를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좀 예술을 하고 싶습니다. 자유롭고 싶고. 연기도 해보고 싶고, 연애도 해보고 싶습니다. “ 뜨아. 연애를 해보고 싶다니. 일하고 있는 아내도 있다면서 저렇게 대놓고 이야기 하는 건 뭐지?
“네. 좋습니다. 에너지가 좋으시네요. 그래서 어떤 이야기를 해보고 싶으세요?”
“최근에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가고 싶은데, 아내가 질색팔색을 하거든요. 그런데 아내는 딸이 자기에게 연락 안한다고 서운해하고 전화오면 좋아하고. 그런 게 너무 얄미워요. 자기도 그 입장이 되보면 서운할텐데.”
“좋습니다. 그걸 한 번 써보세요. 있었던 대화도 좋고 그대로 한 번 써보세요. 마지막 시간까지 써서 와 보세요.”
“저는 김미자 라고 합니다. 저는 배우는 것을 많이 좋아합니다. 남편은 내가 뭐 배우러 나가는 걸 싫어하는 데 아들이 자꾸 응원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보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중학교 까지 마쳤어요. 고등학교를 김천에서 나왔습니다. 대학을 야간 대학을 나오고 지금은 야간 대학원 다니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 억지를 부려서 고등학교를 갔는데 동생은 나 때문에 남자인데도 자기는 고등학교를 못갔다고 원망을 해요. 전 제가 벌어서 갔는데도 말이죠. 내가 벌어서 자기 학교 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계속 뭔가를 배우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엄마한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내가 학교 다니게 허락해줘서 고맙다고. 남편은 너무 미워 죽겠어요. 내가 배우는 걸 그렇게 싫어하거든요.”
“좋습니다. 선생님은 결핍이 많으시네요. 결핍이 많으신 분들이 할 이야기가 많거든요. 주인공은 절박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하고 싶으신 게 많을 거 같아요.”
“네. 공인 중개사 자격증도 땄고, 대학원이 끝나면 유학도 가고 싶어요. 아들이랑 같이. 남편은 허락을 안하겠지만 둘이서라도 떠라려고요.”
“그럼 그 상황을 써보시는 건 어떠세요? 남편 몰래 유학을 떠나려는 데 여권을 숨겨두었는데 들키는 상황.”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쁘장하게 나이 든 내 또래 여자가 말한다.
“제 이름은 권삼석 입니다. 이름이 안 예쁘죠? 아버지가 남자애 바라면서 이렇게 지었습니다. 덕분에 제 밑으로 남동생이 한 명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애 키우고 공부 시키느라 그만두고 집에만 있습니다. 애들이 중 고등학생이 되고, 남편은 사업하느라 바쁘니까 집에 있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답답해서 나왔습니다. 저는 특별하게 결핍 같은 게 없네요.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아쉬운 건 주말에 집에 있으면 가족들이 같이 있어도 아무도 나랑 놀아주질 않아요. 일주일 내내 자기들 뒤치닥거리 다 해줬는데. 다들 자기 방에 있으면서 대화도 안하고…”
“뭘 하고 싶으세요?”
“가족들이랑 놀러 가고 싶어요.”
“그럼 그걸 한 번 써보세요. 권선생님은 가족들이랑 놀러 가고 싶다. 그런데 그게 힘들다. 각자 바빠서. 그럼 놀러갈 수 있을까? 이렇게 질문을 해보세요. 모든 이야기는 질문으로 시작해볼게요. 연극이나 영화에 잘 쓰는 말 중에 매직 이프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에. 만약에 내가 000 라면 어떻게 될까? 만약에 내가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될까? 만약에 000 한 사람이 000 한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어려운 상황을 만들어 보는 거죠.
권 선생님 같은 경우는 가족을 돌보느라 한 달 내내 집 밖으로 나가보지도 못했던 삼석이 좋아하는 벚꽃 길이 오늘이 마지막 절정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뭐 이렇게…이게 재미없으면, 삼석이 다음주면 병원에 들어가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는 데, 가족에게는 아직 말을 못했다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는 어떨까요?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몰아부쳐 보는 거죠. 그리고 그 사람에게 강한 결핍이나 안 좋은 상황을 줘 보는 거죠. 현실에 일어나면 안되는 일을 상상으로 주는 거죠.”
내 차례가 왔다.
“제 이름은 김은희 입니다. 유명한 작가님과 이름이 같죠. 저도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권선생님. 저는 구미에 있어요. 저는 시간이 많아서 영화제 구경도 가고 그랬는데 재미있어 보이는 강좌가 있어서 왔습니다. 저는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는데 오늘은 넘어가면 안될까요?”
“네. 선생님은 이야기가 없는 게 일단 결핍이네요. 좋습니다. 그래도 내 안에 어떤 결핍이 있는지 살펴보고, 자신을 좀 후벼파보는 연습을 해보세요. 영화를 하나 보겠습니다.”
단편 영화 하나를 유튜브를 링크해서 보여주었다.
오래된 영화였다. 제목은 <폴라로이드 작동법>
6분 정도의 영화 였다. 정유미의 어린 시절 출연한 영화였다.
내용은 정유미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선배에게 빌리러 가서 작동법을 배우는 데 실수를 하고 난감해 하는 내용이었다. 이게 뭔 내용이지? 뭘 보라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무슨 내용인가요?”
뭐라고 답을 할지 몰라서 멀뚱멀뚱 서로 쳐다보고 있었다.
권삼석 “여학생이 선배에게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배우는 내용 입니다.”
“맞습니다. 이 영화는 정유미가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배우는 데 그게 무척 어렵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어려울까요?”
권삼석 “선배를 좋아해서요.”
“네. 그렇죠. 여기 짧은 이야기 에서도 정유미는 선배를 좋아해서 그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배우기 힘든 거죠. 표면적인 내용은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배우는 거지만, 우리가 감정을 느끼는 것은 선배를 좋아하는 그 마음, 그 순간의 감정인거죠. 이렇게 스토리에 감정을 스윽 뭍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으로 인해서 정유미의 인생이 달라지죠. 이 영화를 보고 수 많은 감독들이 정유미 배우와 작업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동안 정유미가 폴라로이드 작동법을 배울까 아닐까를 궁금해합니다. 만약에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뭔가를 빌린다면? 여기서 부터 시작한 거죠.
그런데, 그게 폴라로이드 니까 뭔가 감정이 더 레트로 같이 되고 추억이 생기는 거죠.
이걸 여러가지로 응용할 수 있어요.
아까 윤순희 선생님이 말씀하신 휘파람 부는 것을 배우는 게 힘들죠.
왜 힘들까? 집에서는 남편의 눈치를 봐야 해서, 아들의 눈치를 봐야 해서?
그냥 휘파람 부는 게 힘든 것만 보여주죠.
남편과 아들은 지나가면서 한 마디씩 하죠.
그러다, 잔소리를 하는 남편이 화장실에서 미끄러져서 다쳐요.
그때 휘파람을 불 수 있어요.”
모두 웃었다.
“오늘은 이렇게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배웠습니다. 여기에 지문 대사 쓰는 것을 추가하면 되는 데요. 그건 크게 신경쓰지 마세요. 지문은 그냥 상황만 쓰시면 되고, 원래 이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쓰는 거니까 선생님들은 직접 연기하시고 연출하실 거니까 형식에 맞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아는 게 좋으니까 이렇게 해보세요.
1. 거실 - 실내/저녁
순희는 소파에 앉아서 휘파람을 불려고 하고 있다. 잘 되지 않는다. 남편이 방에서 나와서 티비를 튼다.
남편
밤중에 뭐해? 재수없게. 휘파람은 갑자기 왠 휘파람?
우리는 하나의 씬만 씁니다. 씬이 뭐냐면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는 거에요. 우리는 이걸 통채로 한 커트로 찍을 겁니다. 장소와 시간을 적어주는 것을 씬 넘버, 씬 헤더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눈으로 보이는 것을 적는 것을 지문이라고 합니다. 여기 등장인물이 있고 아래에 대사가 있습니다. 어렵지 않죠? 그냥 쓰시면 됩니다. 생각나는 대로 일단 써보세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셋째 시간 까지 저한테 쓴 것을 보내주시면 제가 피드백 해드리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연기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두시간의 수업 동안 뭔가에 홀린 듯한 시간 이었다. 결핍, 욕구.
난 뭘 하고 싶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지?
난 별 모자란 것 없이 살았다.
부모님이 부자는 아니지만 내가 공부하는 데 큰 어려움 없이 도와주셨고,
그닥 이상하지 않는 남자들과 몇 번 연애를 하고,
그것도 시들해져서 지금은 안정된 직장에서 따박따박 월급 받으면서
먹고 싶은 것 먹고,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
부모님은 가끔 잔소리를 하지만, 건강하시고 아무 문제 없다.
내겐 결핍 이라는 게 없다. 근데 결핍이라는 게 있으면 좋겠다.
김미자 씨의 인생이 부러웠다. 저렇게 아둥바둥 사는 게 싫었는데
오늘 갑자기 저 사람이 부자 라는 느낌이 들었다.
미자씨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척 많아 보였다
그 이야기만큼 에너지가 있었다.
버스를 타고 오는 동안 웹툰을 보고 있는 데 재미가 없다. 계속 같은 자리다.
문득 허전하고 배가 고팠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난 결핍이 없구나.
(스타니슬랍스키의 "배우수업" 에서 나오는 서술 방식을 차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