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 연출1
내 이름은 김은희다. 유명한 드라마 작가의 이름과 같다.
구미시 모 학교의 도서관 사서로 15년째 근무중이다.
박감독이 단톡방에 시나리오를 올리라는 톡을 올렸다.
나는 한 페이지 짜리 시나리오를 썼다. 내용이랄 것도 없고 숲을 거니는 장면을 썼다.
이렇게 쓰는 것이 맞는가?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도 시나리오를 올리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여행을 계획하는 박준철의 시나리오
한 컷 영화 "박준철" 시나리오
주말에 혼자 있는 심심한 하루, 권삼석의 시나리오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하는 미자의 하루를 다룬 김미자의 시나리오
휘파람을 배우는 "윤순희" 의 시나리오
새벽 숲을 거니는 여인의 순간을 담은 김은희의 시나리오
대단하다. 모두 일주일 만에 어쨌든 시나리오를 올렸다. 이게 가능하구나. ㅋㅋㅋ.
또 두 명이 줄어들었다. 이제 나온 사람은 어머니와 여행 가자고 아내를 설득하는 이야기를 올리신 남자 분과 여자 네명 만이다. 딸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신 선생님은 오늘 나오지 않으셨다. 무슨 일 인지 궁금했다. 아마 자신을 오픈 하시는 게 힘드셨나 보다. 벤츠를 타고 다니셨는데 여기 와는 좀 불편하셨나 보다.
오늘은 연출 수업이다. 한 시간 안에 연출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알려준다고 했다. 연출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아는 거 라고는 NG 와 OK 라고 외치는 사람이고, 대장 짓을 하는 거 알고, 봉준호, 박찬욱 감독 이라는 이름은 들어봤는데 어떤 일을 구체적으로 하는지 모르겠다.
감독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만 연출 이라는 것이 막연하게 너무나 멀고 대단한 일 처럼 여겨졌는데 그걸 한 시간 만에 알려 준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럼 누가 영화학교를 다니고, 누가 연출을 못하겠나. 라는 생각으로 수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잘 알면 자기나 잘나가는 영화 감독이던가. 뭐 잘 하는 것과 잘 알려주는 건 또 다른 영역이긴 하다. 봉준호 감독이 이런데 오기는 어렵겠지?
박감독 ”모두들 다양한 이야기를 올려주셨습니다. 다 나름 좋은 이야기 입니다. 그런데 이번 수업에서는 주인공이 절박하게 무엇을 하고자 한다 라는 틀을 유지 하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드라마를 익히는 거니까요.“
뜨끔했다. 영화라는 게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쓰면 되는 거지. 예술에 어떤 제한이 있을게 뭐람.
박감독 ”시나리오에 대한 코멘트는 따로 하겠습니다. 오늘은 연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연출이 하는 일은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무엇을 찍을 지 정하는 사람이고, 그것을 어떻게 구현할지 의견을 모으는 사람이고, 그중에서 방법을 선택하고, 마지막에는 그것이 제대로 구현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결정하는 사람입니다. “
“연출자는 대본속에서 어떤 부분이 필요한지, 어느정도로 중요한지 결정하는 사람입니다. 관객들에게 그것을 일일히 말을 해줄 수 없겠죠. 우리는 그것의 약속을 쇼트 라는 것으로 합니다."
"카메라를 켜고 끄게 되면 연결된 하나의 파일이 생깁니다. 이것을 우리는 커트 라고 합니다. 끊어지지 않고 연결된 영상을 하나의 커트 라고 합니다. 반면에 쇼트 라는 것은 어떤 사이즈로 찍을 것 이라는 정보를 알려줍니다. 쇼트에는 크게 클로즈업 쇼트, 바스트 쇼트, 미디엄 쇼트, 풀 쇼트가 있습니다."
커트 - 물리적으로 끊김없이 연결된 영상, 녹화 버튼을 누르고 정지 버튼을 누르면 하나의 커트.
테이크 - 동일한 커트를 여러 번 반복 해서 찍을 때 여러 테이크가 만들어진다.
쇼트 - 화면에서 보이는 인물의 크기, 혹은 내용에 대해 구분할 때 쓴다. (바스트 쇼트, 투 쇼트 등등)
하나의 커트는 편집에서 여러 개의 커트로 나뉘어진다.
이동하는 카메라나 이동하는 인물을 찍거나 그것이 결합되어서 촬영된 한 개의 커트는 여러개의 쇼트를 포함하기도 한다. 이것을 가장 잘 쓰는 감독이 한국에서는 봉준호 감독이다.
보통의 상업 영화는 한 편에 1500 여개의 커트로 이루어 져 있는데 봉준호 감독은 700 여개의 커트,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 같은 경우는 2000 개 이상의 커트로 되어 있다. 홍상수 감독은 70-80개의 커트.
쇼트로 보자면 봉준호 감독은 700 여개의 커트에서 1000개 이상의 쇼트를 만든다. 반면에 최동훈 감독은 커트의 수와 쇼트의 수가 비슷하다. 홍상수 감독의 쇼트 수는 100개 이상이다. 홍상수 감독이 줌을 많이 쓰는 데 커트는 동일하지만 그 속에서 쇼트는 달라진다. 감독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의 커트 안에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박감독이 아래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이 외에도 익스트림 클로즈업, 롱쇼트, 익스트림 롱 쇼트가 있습니다. 연출자가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이겁니다. 대본에 나와 있는 것을 어디에서 부터 어디까지 어떤 사이즈로 찍을 것이라고 정하는 것 입니다. 사이즈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중요한 것은 크게, 필요한 사이즈만큼 정확하게 입니다."
무슨 말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여러분들 옆에 있는 분을 한 번 쳐다보세요. 가까운 분과 대화를 한다고 생각하면 맞은 편 분이 어느 정도 사이즈로 보이시나요?"
"바스트 쇼트요"
"네. 그래서 대부분의 대화들은 이렇게 바스트 쇼트로 찍습니다. 그럼 클로즈업은 언제 사용할까요? 클로즈업은 좀 더 중요한 대화나 집중해야할 대화들에 쓰이겠죠. 이게 평소에 하는 대화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거나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는 이렇게 미디엄 쇼트 정도로 찍어도 됩니다. 그런데 만약 아주 일상적인 밥 먹었어. 라는 대사를 할 때 클로즈 업을 쓴다면 관객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그 대사가 아주 중요하다고 받아들일 겁니다. 근데 이게 나중에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면 관객들은 혼란스럽게 되는 거죠"
이번은 이해가 좀 되었다. 중요한 것은 크게. 그리고 중요도나 보여주려는 것에 맞는 사이즈를 정하라.
박감독 "연출자가 얼마만큼 중요하고 무엇이 보여야 하는 지를 정하기 위해서는 인물의 감정이 어떠한지, 이 장면에서 꼭 보여주어야 할 게 무엇인지 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쇼트 사이즈를 정하기에 앞서, 이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뭔지 정해보세요. 여러분들 시나리오에서 어떤 대사, 혹은 어떤 표정, 어떤 분위기, 어떤 정보가 가장 중요한지를 정해서 그 우선 순위를 1번 부터 순서를 매겨 보세요. 전체가 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디에서 부터 어디까지 인지 정해보세요."
사람들이 자신이 출력해왔던 시나리오 위에다 / 를 치면서 번호를 매기고 있었다.
내 시나리오에는 그렇게 표시를 할 게 없었다. 나는 그냥 숲에서 거닐고 있는 그 풍경, 아침 안개가 자욱한 숲 길에 여자가 걷고 있는 그 풍경이 떠올랐을 뿐이다. 그런데, 옆을 보니 다른 사람들은 수학 문제를 풀듯이 시나리오에 줄을 치고 번호를 매기고 있었다.
박감독 "지금 여러분이 이렇게 / 를 치시고, 중요한 정도가 변화 했다고 하는 것이 연출자의 해석이고 결정입니다. 여기서 쇼트가 바뀌게 됩니다. 쇼트가 바뀔 때 커트로 넘길 수도 있고, 카메라의 이동으로 새로운 쇼트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떤 사이즈로 찍어야 하는 지 머리 속으로 한 번 상상해보세요. 어떤 사람의 표정이 중요하다고 하면 클로즈 업이나 익스트림 클로즈 업으로 찍어야 겠지만, 둘의 대화 하는 표정이 동시에 나와야 한다면 아무래도 투 쇼트 바스트 쇼트가 되어야 겠죠. 연출자가 결정하는 것 중 가장 기본이 어떤 것이 중요하고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어느 사이즈 여야 한다는 것을 정하는 것 입니다."
"연출에서 배워야 할 것은 이게 전부 입니다. 나머지는 각자 취향과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구현하는지 하나씩 실현해보면 됩니다."
기생충의 장면을 보여주고,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스토리보드를 보여주었다.
박감독 "이 장면을 보고 봉준호 감독이 이 장면에서 어떤 점을 보여주려고 이렇게 쇼트를 구성했는지 생각해보세요.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 사이즈는 어떤지, 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봐주세요."
기생충 각본집 -봉준호-
"시나리오와 영화를 한 번 비교해 보세요. 그리고 스토리보드를 살펴보겠습니다. 시나리오와 스토리보드는 연출자가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것을 정리하고자 하는 것도 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찍고 어떻게 찍을지를 알려주는 것 입니다."
기생충 스토리보드 -봉준호-
"우리는 화면이 밝아지면 제일 먼저 걸려 있는 양말을 보게 됩니다. 왜 이런 쇼트를 첫 쇼트로 잡았을까요? 시나리오에서는 어떻게 나와 있나요? 시나리오에는 그냥 반지하 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화 전체를 보면 여기가 반지하 라는 게 아주 중요한 설정이죠. 근데 반지하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 주는 게 어떤 쇼트 일지 감독은 고민했을 것입니다. 반지하 라는 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기 위해서 충돌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는 천장인데 밖으로 보면 바닥 인 거죠. 거기에 양말이 걸려 있습니다. 햇빛을 받아서 말려야 할 빨래인데. 바닥에 있어야 할 양말이 천장에 걸려 있고, 거기는 또 바닥인 묘한 상황인거죠. 그런데 카메라가 아래로 내려옵니다. 거기에 우리의 주인공이 있습니다. 이런 카메라 움직임이 나중에 반지하에 살던 가족이 지상에 나왔다가 지하에 사는 가족을 죽이게 되는 기생충의 이야기와 맥락이 닿아 있습니다."
"기생충의 첫 쇼트는 양말로 시작해서 기우의 클로즈 업으로 끝납니다. 클로즈 업이 될 만큼 중요한 인물 이라는 이야기 이고 그의 표정에 집중하겠다는 표시입니다. 이 씬에서 봉준호 감독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시나리오에서는 여러가지 정보가 나와 있습니다. 스토리보드에서는 그 정보들이 감독이 어떤 것이 얼마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씬에서 감독은 전체 중요한 인물을 소개 시켜주려고 합니다. 이것은 시나리오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우는 어떤 사람인가요? 기우는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려는 사람입니다. 그의 동선을 따라서 집의 구조가 보이고, 그 동선을 따라서 한 명씩 관객에게 인물을 소개합니다. 이어서 기정이 등장합니다. 기정은 어떤 사람일까요? 기정은 기우의 행동을 보충하고 지시하는 사람 입니다. 이어서 기택과 충숙이 등장합니다. 충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택은 잠을 자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커트 (쇼트 로는 기우 단독- 기우 기정 2쇼트- 기우 단독-기우 오버 숄더 충숙, 기택 풀쇼트) 로 네 명의 인물을 모두 소개 합니다. 충숙과 기택을 하나의 쇼트로 잡기 위해서 그들은 풀 쇼트로 잡았습니다. 그 다음 커트가 되면서 쇼트는 충숙과 기택의 투쇼트 바스트 혹은 투쇼트 클로즈 업이 됩니다. 이게 무슨 신호인가요? 이들의 대사가 중요하다는 것 입니다. 계획이 뭐야? 라고 충숙이 묻죠. 아시다시피 이 부분은 중요한 대사 입니다."
-계속-
** 스타니슬랍스키의 "배우수업" 의 서술 방식을 차용했습니다.
** <기생충> 각본집과 스토리보드 일부분 이미지를 삽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