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와 체호프가 그린 죽음이라는 낯선 세계
죽음으로 가는 길 가운데 고통과 외로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지루한 이야기»에서는 공통적으로 주인공에게 위안을 주는 존재가 등장한다. 이반 일리치에게는 하인 게라심이, 니콜라이 스쩨빠노비치에게는 수양딸 까쨔가 바로 그런 존재였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게라심은 유한한 운명을 공유하는 또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이반 일리치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주인공에게 매우 큰 공감과 지지를 건넸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곧 흙이 되어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인간 일반이 모두 죽는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나만의 감정과 생각을 가진” 고유한 존재인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p.72)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달리 게라심은 인간이 바꿀 수 없는 운명을 담담하게 인정했기에 공포와 불안에 휘둘리지 않고 한 인간의 도리를 다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그 자체로 ‘자연의 섭리’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게라심만이 거짓말하지 않았다...그만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쇠약해진 주인 나리를 진정으로 가엾게 여기고 있었다. 한 번은 이반 일리치가 이제 그만 가라고 하자 게라심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린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를 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의 이런 말에는 자기는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힘들지 않으며 또 언젠가 자기가 죽어갈 때에는 누군가가 자기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 아니겠냐는 뜻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pp.83-84)
작중에서 게라심은 이반 일리치를 근본적인 성찰의 길로 인도한 초자연적 힘을 상징하기도 한다. 주인공은 꿈에서 누군가에 의해 “컴컴하고 깊숙한 자루” 속으로 밀려 들어간 후에 뒤이은 충격으로 “삶과 죽음이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질문”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 ‘누군가’가 바로 게라심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게라심으로 표상되는 ‘자연의 섭리’가 주인공을 최후의 심판대 위에 올려놓았다고 할 수 있다.
“새벽 3시경까지 그는 혼미한 상태로 고통에 빠져 있었다. 그는 누군가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어딘가 좁고 컴컴하고 깊숙한 자루 속에 집어넣으려고 자꾸만 밀어대는데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쿵 하고 굴러 떨어졌고 그 순간 그는 정신이 들었다...그는 긴 양말을 신은 앙상한 두 다리를 게라심의 어깨 위에 여전히 그대로 올려놓고 있었다.” (p.100)
게라심이 이반 일리치보다 한 발 앞선 선지자라면, «지루한 이야기»의 까쨔는 니콜라이 스쩨빠노비치와 삶의 여로를 함께하는 길동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겉으로만 보면 니콜라이 스쩨빠노비치와 까쨔의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주인공은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학자이자 늙은 남성인 반면, 까쨔는 무명의 여배우이며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버림받은 젊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까쨔는 주인공과 달리 자신을 지켜줄 ‘빛나는 이름’을 가지지 못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름 뒤에 감춰진 실제 삶에서 그들은 놀라울 만큼 닮아있었다. 가령 주인공에게 학문과 강의의 세계가 전부였다면, 까쨔는 연극에 매료되어있었다. 주인공에게는 강의실이 (모든 학문과 사상의 경계를 허무는) 통합의 장이었다면, 까쨔에게는 연극 무대가 모든 예술을 통합하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 어떤 예술도 그 어떤 학문도 독자적으로는 무대만큼 강력하고 진실하게 인간의 영혼을 뒤흔들 수 없”다고(p.41) 보았다는 점에서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통합’의 가치를 높이 샀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강의실에서 무력감만 느끼게 된 니콜라이 스쩨빠노비치처럼 연극 무대에서 내려와 상실감에 빠져 살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이렇게 비슷한 내면세계의 곡절을 겪었기에 서로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넬 수 있었다.
까쨔는 작중에서 주인공의 죽음을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이다. 젊지만 무기력한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명예는 얻었으나 생명의 기운은 잃어가는 니콜라이 스쩨빠노비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까쨔는 그에게 자신의 돈으로 치료를 받으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사실은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극적으로 표현되었다. 니콜라이 스쩨빠노비치의 자기반성과 패배감이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 까쨔가 들이닥쳐서 그의 절망감을 표현하듯 울부짖었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스쩨빠니치! 저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요! 못 살아요! 제발, 지금 당장 말씀해주세요. 어떻게 해야하지요? 제가 무얼 해야 할지 말씀해주세요!”” (p.105)
주인공은 삶의 방향성을 잃고 절규하는 그녀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으며, 자신이 죽음을 앞두고 고통받고 있는 원인을 확실하게 자각하게 되었다. 까쟈 또한 게라심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이 자기반성의 단계에 이를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이렇듯 톨스토이와 체호프 모두 인생의 종착점에 다다른 주인공이 새로운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작품에 조력자와 안내자를 배치해 두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성공적으로 삶을 주도해왔던 두 소설 속의 주인공은 죽음의 공포와 직면한 뒤 자신들이 쫓던 가치와 삶의 방식에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하게 되었다. 생과 사의 경계에 서보니 기존의 안온하고 안락했던 삶이 실은 어느 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신기루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선 두 인물은 굴절되고 왜곡된 삶을 바로잡기 위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반 일리치는 “‘어쩌면 내가 잘못 살아온 건 아닐까?’”(p.103)라는 질문과 마주했다. 이는 그가 게라심에 의해 검은 자루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꾼 뒤 떠올린 질문이었다. 그는 최대한 그러한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했으나 선량한 게라심의 얼굴과 자신을 닮은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비교해본 뒤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더 이상 자신이 잘못 살아왔다는 점을 부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똑바로 누위 완전히 새로운 시각에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날 아침 시종과 아내, 그리고 딸과 의사를 차례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날 밤 깨달은 끔찍한 진실을 그에게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바로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삶의 방식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모든 것이 삶도 죽음도 가려버리는 하나의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기만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깨달았다.” (p.112)
체호프의 니콜라이 스쩨빠노비치 또한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끝에 그는 자신의 소망과 생각, 감정 등이 파편화되어있으며, 이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공통이념”이 부재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오랜 시간 ‘통합’의 이상을 추구해왔으나, 남은 것은 ‘이름’과 ‘실제 삶’ 사이의 괴리, 파편화된 가치관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는 앞서 언급한 까쨔와의 만남 이후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삶의 이정표가 될만한 공통이념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명확히 하게 되었다.
“과학에 대한 나의 애착, 더 살고 싶다는 나의 소망, 낯선 침대에 앉아 스스로를 알려고 하는 시도, 이 모든 생각과 감정, 그리고 내가 삼라만상과 관련하여 정립하는 개념들에는 모든 것을 하나의 전체로 엮어주는 공통적인 무언가가 빠져있다...그리고 만일 그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p.103)
“동료 철학자들이 공통이념이라 부르는 것이 내 안에 없다는 걸 나는 인생의 황혼에, 죽음을 목전에 둔 최근에 와서야 알아차렸다. 그런데 이 가엾은 녀석의 영혼은 이제까지도 안식이란 걸 몰랐지만 앞으로도 평생, 한평생 모를 것이다!” (p.106)
최종적인 자아성찰을 거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패배감을 맛본 두 인물은 각자 다른 끝을 맞이했다.
먼저 «이반 일리치의 죽음»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자신의 기만적인 삶을 연상시키는 주변인들에 대한 원망과 무엇도 바로잡을 수 없다는 무력감으로 인해 고통에 시달리던 주인공은 꿈속에서 본 검은 자루 속으로 더 깊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한참을 몸부림치던 그는 자신이 그러한 힘에 저항하면 할수록 어둠은 짙어지고 고통은 더 커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명의 힘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순간 그는 희미한 빛을 봤으며, 끝내 자신이 잘못 살아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후 그는 늦게나마 잘못을 바로잡을 방법을 강구했다
이를 위해 그는 연민의 시선으로 주변인을 바라보았으며, 원망과 경멸의 마음으로 이들을 대했던 것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던 ‘품위’와 ‘유쾌함’이 ‘허위’와 ‘허영’에 불과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동시에, 여전히 그러한 허상을 쫓고 있는 인간 일반을 관용의 시선으로 바라본 것이다. 바로 이때 환한 빛이 죽음의 공포를 뒤덮었으며 그는 빛의 세계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고통을 끝내고 삶을 바로잡을 방법은 바로 ‘용서’와 ‘참회’였던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곁에서 떠나지 않던 죽음의 공포를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죽음은 어디에 있지?...죽음이란 것은 없었기 때문에 이제 그 어떤 공포도 있을 수 없었다.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 (p.118)
반면 «지루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반 일리치와 같은 영적인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그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자신을 구원해줄 ‘공통이념’을 찾지 못한 것이다. 같은 처지에 있는 까쨔는 그에게 제발 한마디만 해달라며 애원했다. 어쩌면 그녀와 함께 답을 찾아나서는 것이 혼란과 고통 속에서 빠져나올 최선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요구를 애써 외면함으로써 근본적인 결함을 고칠 기회를 놓쳤고, 실망한 까쨔는 매정하게 떠났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까쨔를 허망하게 떠나보내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까쨔는 내 방에서 나가 뒤도 안돌아보고 기다란 복도를 걸어간다...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검은 옷자락이 마지막으로 잠깐 펄럭하더니 발소리가 잦아들었다...안녕, 나의 보석이여!” (p.107)
하지만 명심할 점은 «지루한 이야기»가 주인공의 죽음으로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체호프가 그리지 않은 뒷이야기는 우리의 상상의 몫이다. 따라서 우리는 까쨔가 떠난 뒤에도 주인공에게 얼마간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라 상상해 볼 수 있다.
이반 일리치는 세상을 뜨기 한 시간 전쯤에 참회와 용서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는 그가 죽음의 고통을 상징하는 ‘검은 자루’에서 구원을 상징하는 ‘빛나는 구멍’으로 굴러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 변화였다. 따라서 체호프가 채우지 않은 여백에는 허망함과 무력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도 있다. 니콜라이 스쩨빠노비치의 죽음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여긴 이반 일리치처럼 또 다른 질문을 던지는 니콜라이 스쩨빠노비치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바로 그 순간 이반 일리치는 구멍 속으로 굴러 떨어졌고 빛을 보았다. 동시에 그는 그의 삶이 모두 제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아직은 그걸 바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문했다. ‘그게’ 뭐지?” (p.117)
우리는 살면서 죽음이라는 극적 사건 없이도 두 소설의 주인공과 같은 경험을 한다. 전부라고 믿었던 세계와 나를 지탱하던 가치관이 무너지는 경험 말이다.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될 때, 낯선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는 변화의 필요를 직감하는 그런 순간마다 무언가를 되돌리고 바로잡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주도권을 내준다. 이반 일리치가 잘못 살아왔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려고 했던 것처럼, 니콜라이 스쩨빠노비치가 까쨔를 무기력하게 떠나보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는 세상을 떠나기 1시간 전에 용서와 참회를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영원히 바꾸었다. 패배감에 잠식된 니콜라이 스쩨빠노비치에게도 아직 기회는 있다. 그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이 톨스토이와 체호프가 두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였을 수 있다.
죽음이 끝나지 않은 이상, 즉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페이지 표기는 다음의 책을 따름.
레프 니꼴라예비치 똘스또이 지음, 이강은 옮김, «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 2012.
안똔 체호프 지음, 석영중 옮김, «지루한 이야기», 창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