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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백송자 Feb 15. 2024

100년의 기억, 소제동

100년의 시간이 기록된 곳, 대전 소제동 골목

솔랑산 상상봉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서낭당에서 잠시 숨고르기를 한다. 소제호蘇堤湖를 노랗게 물들인 어리연꽃은 부귀영화의 꽃말을 전하려 목을 길게 빼고 태양을 향해 소지를 올린다. 우암 송시열은 구기자와 국화를 심으며 기국정杞菊亭에서 여러 문인과 학문을 논하고 목민에 온 힘을 기울인다. 민초들은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논밭에서 땀을 흘린다. 100년의 시간이 기록된 곳, 대전 소제동 골목은 지난한 삶의 이야기를 옹골차게 붙들고 꿈틀거린다. 


 대전의 역사는 대전역에서부터 출발이다. 1904년 역이 건설되고 이듬해 경부철도가 개통되면서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전 만해도 대전은 농촌지역이었으나 역이 생기면서 주변에 마을이 들어서고 또 호남철도가 통과하면서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많은 노동자가 대전의 미래에 꿈을 실으며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너른 밭, 한밭은 역 부근을 중심으로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대전역 동편에 있던 소제호를 메워 마을을 만들었다. 솔랑산 아래 소제호는 축구장 일곱 개 정도로 크고 주변이 아름다웠다. 굵직한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며 초록의 몸빛으로 호수를 감쌌다. 주로 농업용수로 쓰였지만, 연꽃이 피는 여름이면 호수는 가부좌를 틀고 중생의 번뇌를 씻어 주었다. 마을은 철도 근로자들이 거주하면서 철도관사촌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한때 100여 채의 관사가 들어찼던 소제동은 도심이 옮겨가면서 서서히 성장을 멈췄다. 지금은 일본식 가옥과 시멘트 벽돌집 그리고 개조한 현대식 건물이 경계를 허물고 엇박자로 닿아 있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이곳이 최근 핫한 플레이스로 주목을 받는다. 젊은 예술가들이 현존하는 철도관사 42호에 소제창작촌 어리연을 열어 문화의 종을 쳤고, 청년 사업가들이 낡은 집을 카페와 식당으로 바꿔 은은한 종소리를 담는 장소로 만들었다. 과거의 공간에 희망의 소리를 담아냈다. 솔랑시울길, 수향길에서 오래된 흔적을 마주하는 이의 온기로 동네는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장소도 생명력은 있다. 죽은 듯 납작 엎드려 있다가도 어느 순간 때를 잘 만나면 활기차게 변모하는 게 땅이다. 물론 땅은 발이 있어 움직이는 건 아니지만, 사람의 열정에 의하여 달라진다. 현재의 소제동은 축적된 근대의 시간 위로 현대의 시간이 잠시도 쉬지 않고 흐른다. 다만 미래가 각기 다른 주장으로 바람에 나부낀다. 보존과 개발이라는 두 개의 축이 충돌하고 있다. 팽팽한 축은 서로에게 흠집을 내며 내 것이 더 단단하고 쓸모가 있다고 소리를 지른다. 양보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옳고 그름의 논쟁을 멈추고 균형과 발전으로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땅, 소제동으로 거듭나는 길을 찾으면 될 것이다.

 

 사라진 소제호나 솔랑산은 어쩔 수 없지만, 현재 소제동의 모습은 어떤 형태로든 보존되어야 하지 않을까. 가급적이면 훼손하지 않고 지금 그대로 그 자리에 남을 수만 있다면. 소제동이 간직하고 있는 본연의 역사와 문화에는 덧칠하지 않으면 좋겠다. 


 나무 전봇대 아래에서 오랫동안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은 네모지고 길쭉하다. 골목 끝에서 자야, 자야, 친구의 목소리가 들릴 듯하여 목을 쭉 빼고 기다린다. 내가 처음 대전에 와 살던 때, 아직은 대전에 대하여 잘 모르던 때다. 열차를 놓치고 친구네 집을 찾아갔다. 시커먼 적산가옥은 역사의 아픔을 보란 듯이 드러냈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은 지난한 삶을 감추고 동여매고 있었다. 농촌보다 옹색한 도시의 달동네였다. 물어물어 친구네 집을 알아내고 골목에 직접 닿은 창문을 차마 열지 못하고 밤새 이야기 나누며 아침을 맞았다. 


 지난 기억을 더듬어 친구네 집을 찾아본다. 헐거워진 창살 아래 숨겨진 저 집이 아닐까 싶어 기웃거린다. 창문을 열면 앉은뱅이책상 앞에 옹송그리고 앉은 친구가 고개를 돌려 웃으며 반겨줄 것 같다. 담벼락으로 줄기를 뻗고 대롱대롱 매달린 애호박을 뚝 따서 부침개를 해주던 친구 어머니의 거칠고 투박한 손등도 떠올라 대문 안을 깊숙이 들여다본다. 하지만 집안은 고요하고 바람길만 골목을 향해 뻗어있다. 오래도록 사람이 살지 않아 쌓인 먼지가 일어날 뿐이다. 녹슨 우편함에 꽂힌 우편물의 수신자 이름이 흐릿하게 내 눈에 들어온다. 친구와는 연결고리가 없다. 


 젊은이들이 통통 튀며 다가온다. 잘 가꾸어진 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역사의 밝음과 어둠의 빛을 청춘의 시선으로 본다. 이들이 지나간 자리가 비었다 싶으면 또다시 다른 청년들이 오가고 골목은 혼자가 아니다. 한참 뒤에는 내 또래의 사람들도 빛바랜 담벼락에 기대어, 녹슨 파란 대문 앞에 서서 추억을 만나 진솔하게 대화한다. 소제동 골목은 과거와 현재가 그리고 청년과 늙은이가 조화롭게 공존한다. 젊은 층은 미래를 찾고 노년층은 과거를 그리워한다. 소제동의 곳곳은 수많은 길손을 안아준다. 


 사람이 보고 싶을 때면 문득문득 찾아오는 골목, 소제동에서 바람결에 연꽃들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귀를 모은다. 연잎 차 한 잔 들고 대숲을 지나 감나무에 깃든 까치를 깨워 반가운 소식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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