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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May 17. 2023

[D+29] 집으로


 어제도 방에 코 고는 분이 한 분 계셔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어차피 떠나는 날인데 늦잠을 잘 까봐 잠에 잘 들 수 없기도 했다. 침대 위에서 동영상도 보고 노래도 듣고 하다가 잠시 잠에 들었다가도 금방 깼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5시가 가까워지는 새벽. 날씨 확인 어플을 열고 일출 시간을 보니 5시면 해가 이미 뜬 시각이라 나온다. 폰과 이어폰만 챙겨서 후다닥 나왔다.


 타이베이의 새벽 아침을 보고 싶었다. 숙소를 나가자마자 훅 끼쳐오는 더운 바람. 그런데 숙소 에어컨 바람 때문인지 이 더운 공기가 따듯하게 느껴졌다. 긴팔에 긴 바지를 입었지만 덥지 않았다. 



 타이베이의 오전 5시 풍경. 흡사 오후 해 질 녘 같기도 하다. 다만 한산한 거리가 오전임을 말해준다. 고요한 거리는 간간히 차와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소리로 메워졌고 그 외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뿐이었다. 조용한 거리가 너무 좋았다. 그래서 어제 갔던 야시장을 지나 공원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골목마다 하늘의 색이 달라진다. 이 골목에서 보는 하늘은 분홍색. 진짜로 초저녁 같다.



 이 골목은 새벽 같기도 밤 같기도. 그렇게 골목골목을 지나 야시장까지 걸어왔다. 



 어제 그 인산인해를 이루던 거리가 맞나 싶다. 노점상들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철수했고 거리도 야시장이라 하기 무색할 만큼 쓰레기가 보이지 않는다. 야시장길을 걷는 내내 신기해서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이 낙화야시장은 12시에 문을 닫는다. 12시에 문을 닫고 몇 시까지 뒷정리를 했을까. 깨끗하게 정리된 거리에서 누군가의 손길을 느낀다.



 그렇게 공원에 도착. 한숨도 못 잔 건 아쉽지만 그래도 그 덕에 떠나기 전 하고 싶었던 일을 이룰 수 있었다. 아침 공원은 푸르렀다.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 오전 다섯 시 반이라는 시간이 무색할 만큼 활기찼다. 천천히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잠시 벤치에도 앉아있다가 샤워를 하고 마지막으로 짐을 싸야 할 것 같아 엉덩이를 뗐다.

 


 돌아가는 길. 아까보다 더 밝아졌다. 해가 눈이 부시다. 오늘도 더운 날이겠구나. 가는 날 화창한 게 아무렴 좋지.


 숙소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더니 7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침도 먹어야 하고 근처에서 사 올 것도 있는데. 어제 잠을 못 잔 탓에 눈을 깜빡일 때마다 잘 떠지지 않는다. 잠시만이라도 침대에 눕고 싶었는데 누우면 그대로 기절할 것 같았다. 지갑을 챙겨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 아침식사로 딴삥을 먹고 싶었는데 주변을 아무리 돌아도 파는 곳이 없다. 지방에서는 아침 사방천지에 아침밥 파는 곳이던데 여기는 그런 게 없다. 아니면 내가 못 찾는 것일 수도. 아무튼 빵집과 편의점이 가득한 이곳은, 대도시다.


 결국 살 것을 사고 패밀리마트에서 아침밥을 샀다. 안에 닭가슴살과 두부, 약간의 밥 같은 것(정체불명)과 버섯, 당근 등의 야채가 들어있는 크레페다. 맛은 그냥저냥. 



 아침을 먹고 양치를 했다. 버릴 것은 싹 다 버리고 짐을 완전히 쌌다. 혹시 놓고 온 것이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없다. 이제 진짜 가기만 하면 된다.


 짐을 들고 숙소 공용공간으로 가서 잠시 쉬어 가려했다. 그런데 무슨 단체에서 온 모양인지 큰 소리로 레크리에이션을 하는 중이었다. 쉬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자리가 협소해서 오래 있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공항 가는 교통편만 검색한 뒤 체크아웃을 했다.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잠을 못 자서 그런지 점점 컨디션이 나빠지는 게 느껴졌다. 사람이 잠을 못 자면 일단 짜증이 난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으면 짜증이 두 배가 된다. 공항 가는 MRT를 타야 했는데, 그러려면 일단 버스를 타고 메인역까지 가야 했다. 짐 때문에 버스에 앉기가 민망해 서서 갔다. 이젠 머릿속에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메인역에 락커에 짐을 보관하고 구경이라도 좀 할까 했는데 도무지 그럴 기분도 체력도 아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공항 MRT 타는 곳으로 직진.



 공항으로 가는 급행 MRT는 30분마다 한 대씩 있었다. 10시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길. 바깥 풍경이 예뻐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밖을 보다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져 잠시 눈을 감았다. 짧은 잠은 아주 달다. 10분 정도 그나마 깊이 잠든 덕에 조금 정신을 차렸다. 내가 탈 비행 편이 있는 1 터미널에 내리니 10시 37분이었다. 비행 시각은 오후 2시 50분.


 MRT에서 내려 공항으로 걸으니 버블티를 파는 coco라는 가게가 보였다. 마지막으로 버블티 한잔 마시고 천천히 공항 구경을 했다. 1 터미널은 공간이 그리 넓은 것도, 그래서 식당가가 크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딱히 갈 곳도, 뭔가 먹고 싶지도 않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노트북으로 영화를 볼까 하다가 보고 싶은 게 없어 덮었다. 그리고 찾은 건, 책. 그리스인 조르바를 조금 읽었다. 역시 이 책은 언제 읽어도 웃기는 책이다. 혼자 히죽히죽 웃었다.


 책은 재미있지만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지금 뭔가를 먹지 않으면 완전히 끼니때를 거스르게 될 것 같아 일단 식당가로 향했다. 가진 돈은 175위안뿐. 현금을 탈탈 털어 가격에 맞춰 점심을 시켰다.



 야채가 많아 시킨 도시락이었는데 김치도 있었다. 원래 밖에서 김치를 잘 먹지 않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김치가 당겼다. 밥만 조금 남기고 나머지는 다 먹었다. 기대 안 했는데 꽤나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이렇게 대만에서의 마지막 끼니를 챙겼다. 이젠 정말 수속을 하고 탑승할 준비를 해야 할 듯했다. 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운터에서 수속을 마치고 바로 출국장으로 향했다. 빨리 안에 들어가 앉아있고 싶어 지체 없이 간 것이었는데 줄을 서고 얼마 되지 않아 단체 관광객들이 우르르 줄을 섰다. 저 뒤에 줄을 섰으면 꽤나 조마조마했을 거다. 그렇게 안전하게 탑승구까지 골인.



 다행히 지연 없이 정시에 탑승구가 열렸다. 맨 끝자리라 두 번째로 비행기에 올랐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 뽀송한 이불 냄새 맡으며 내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싶다. 햇살에 바싹 마른 이불 냄새가 이렇게 그리운 적이 없었다. 호텔이나 호스텔의 침구류는 모두 세제 냄새나 락스 냄새뿐이었다. 햇살 냄새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무사히 부산에 도착했다. 친구와는 카톡, 가족들과는 전화 통화를 하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 한국도 이제 여름이다. 배낭을 메고 걸으니 땀이 난다. 따듯한 공기가 좋다.


 한 달 만에 집 문을 여니 훅하고 익숙한 냄새가 덮쳐온다. 오래된 나무 냄새. 아, 그리웠어. 낯설지만 익숙한 집을 돌아보며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 이제야 긴장이 풀린다. 짐을 풀고 이것저것 정리를 하니 벌써 8시다. 한국은 대만보다 1시간이 빨라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후다닥 저녁 준비를 했다. 시켜 먹을까 생각했지만 직접 해 먹고 싶었다. 여행중에는 할 수 없었던 것. 냉동실에 있는 대패삼겹살과 냉장고에 있는 야채들을 넣고 볶아 먹었다. 맛있다. 


 밥을 해 먹으니 드디어 집에 왔다는 느낌이 든다. 홈 스위트 홈, 이란 말이 왜 있는지 알 것 같다. 집 나가면 고생이다. 그래도 가끔씩은 사서 고생을 하고 싶어지는 때가 있는 법.


 대만에서 하고 싶었던 일 중 못했던 세 가지가 있다. 첫 째, 아리산 등산. 둘째, 시집 사기. 세 번째, 우라이 온천 가서 멧돼지 소시지 먹기. 아쉽지만 이건 다음에 하는 걸로.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아쉬움을 남기고 와야 또 오고 싶다'고. 그래도 이 여행의 가장 큰 목적. 가장 하고 싶었던 위시리스트. 한 달 동안 빠짐없이 글을 쓰기. 이것만큼은 이뤘다.


 이렇게 한 달간의 대만 여행이 끝이 났다. 이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와일드' (리즈 위더스푼 주연)에 이런 말이 나온다.


 수천 킬로미터를 걷는 여정을 보여주는 로드무비인 이 영화에서 리즈 위더스푼은 자신처럼 혼자 걷는 여자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길에서 만난 여자가 리즈 위더스푼에게 묻는다. 길 위에서 외롭냐고. 그리고 리즈 위더스푼의 대답.


솔직히 내 진짜 삶에서 더 외로운 것 같아요.  ㅡ영화, 와일드


이 장면에서 고된 여정이 끝나는 것이 오히려 더 무섭고 막막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저 (목숨을 걸어야 하지만) 걷기만 하면 되는 이 여정이 끝나면.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까.


 그리고 나는. 매일 새로운 곳을 여행하던 하루하루를 끝내고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하나의 방황에 종지부를 찍으면 정착일 줄 알았는데, 그 끝은 새로운 방황의 시작이다.


 그래도 하루하루 내가 원하는 루틴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일상의 즐거움이자 행복인 것 같다. 여행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들. 


 내일 아침엔 동네 산에 아침 산책을, 점심엔 도서관 그리고 저녁엔 운동을 해야지.


 여행하는 자는 한 곳에 뿌리내릴 수 없다. 뿌리내리게 되는 순간 여행자가 아니게 된다. 한 달 동안 해파리처럼 둥둥 떠다니며 산 기분이다. 햇살도 듬뿍, 바다도 맘껏 보았으니 이제 다시 일상으로. 다시 뿌리내리기 위하여.


 다음에는 어떤 글을 쓸까. 몇 일간은 아무런 글도 쓰지 않고 쉬어야겠다.


 그렇게 여행이 끝나는 순간. 


 나는 비로소 휴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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