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
마지막 선물 같은 하루를 받았다.
어제보다 해가 더 쨍하게 떴고, 날이 하루종일 맑았다. 그것만으로도 오늘 내 기분이 좋았다. 아침을 먹고 가보고 싶었던 근처 강가 공원에 가기로 했다. 날씨가 딱 공원에 가기 좋은 날씨였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타이베이에서 크롭티에 짧은 반바지를 입어도 춥지 않았다. 해가 뜨면 이렇구나. 다른 지역에서 느꼈던 뜨거운 햇살이 이미 시커멓게 탄 피부에 내려앉았다. 다리가 화끈거린다. 공원에 도착하니 너무 예쁜 색깔들로 가득했다. 파란색, 초록색, 하얀색, 노란색, 그리고 건물들의 여러 색가지 색깔들.
평일이기도 하고 날씨가 이래서인지 공원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공원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한 바퀴 둘러봐도 몇 분 걸리지 않아 잠시 그늘에 앉아 어딜 갈지 생각했다. 어제 까르푸 구이린점 4층에 있는 '스얼궈'라는 1인 훠궈집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아주 만족스러웠다. 점심 때라 지금 출발하면 딱일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걸어서 디화제와 타이베이 메인역을 가기로 했다.
육수는 매운맛 (30위안 추가), 고기는 소고기로 주문했다. 육수가 향이 거의 없고 약간 장조림 국물 맛이라 해야 하나. 매운맛을 시켰는데도 맵지 않았고 간장맛이 강했다. 호불호 없이 누구나 좋아할 맛이다. 오랜만에 푸지게 야채를 먹으니 기분이 좋았다. 샐러드를 먹긴 하지만 데쳐먹는 야채가 더 맛있다. 어제는 기본으로 나오는 공깃밥은 남겼는데 오늘은 밥까지 싹싹 다 비웠다. 만족스러운 식사. 가격은 288위안. 만원 조금 넘는 금액으로 아주 풍성하게 먹었다. 대만에서도 손꼽히는 가성비 집인 것 같다.
지인들에게 천으로 된 컵 슬리브를 선물하고 싶어서 까르푸에서 밥을 먹은 김에 구경을 했다. 어제도 까르푸에서 물건을 사긴 했지만 다 먹을거리라서 오늘은 슬리브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한 바퀴 돌아 만난 컵 슬리브. (내 눈엔) 귀여워서 바로 이걸로 결정.
처음엔 사이즈가 작아 컵이 들어가지 않는 줄 알았다. 당황해서 반품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세븐일레븐에서 오트라테 한 잔을 사 꽂아보았다. 커피를 마시지 않으려 했는데. 마시려고 한 오렌지주스 기계가 고장이라 할 수 없이(변명) 마셨다. 내 건 0% Sugar 0% Ice. 저기 적힌 문구가 다 다르다. 지인들의 성향에 맞게 하나하나 다르게 골랐다. 나는 0% Sugar 인 게 마음에 들었다.
나름 만족스러운 쇼핑까지 마치고 걸어서 디화제로 출발. 날이 덥긴 했지만 바람이 살살 불어 걷기 아주 좋은 날씨였다. 대만은 길 곳곳에 잔디가 있어 눈이 즐거웠다. 너무너무 좋다! 한국도 이제 여름이 오겠지. 나는 여름이 너무 좋다.
디화제에 가는 길. 걸어가면 중간중간 놓치지 않고 사진을 찍을 수 있어 좋다. 길을 잃어도 좋고. 가끔 길을 잃는 재미가 있다. 그런 게 걸어가는 맛이다.
디화제에 도착해 메인 거리 말고 골목골목을 구경하는데 분위기 있는 건물이 눈에 띄었다. 바깥에서 보니 안에 엘피판이 가득했다. LP 파는 곳인가? 하고 보는데 3층에 등이 켜져 있다. 뭐지. 3층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열고 직원분이 나오셨다. 앗. 눈이 마주쳤다. 내가 궁금해하는 걸 아셨는지 중국어로 뭐라 하셨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웃으니 외국인인 걸 알고 영어로 설명해 주신다. 1층부터 3층까지 카페라고. 아, 그렇구나. 친절한 설명을 듣고 있는데 어쩌다 보니 메뉴판 앞에 서게 되었다. 커피와 밀크티, 와인까지 여러 음료를 파는 곳이었다. 그런데 가격이 만만찮다. 대부분 250~300위안 대의 가격이다. 음료 한 잔이 저 가격이면 한국에서도 비싼 가격이다. 그래도 호기심이 동했다. 커피는 이미 마셔 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중에 눈에 띈 아메리칸 레모네이드. 이게 뭐죠? 하니 와인에 레모네이드를 넣은 거라 한다. 오. 그걸로 할게요. 가격은 280위안. 으윽. 점심으로 먹은 훠궈와 비슷한 값이다. 그래도 한 번도 마셔본 적 없으니 콜.
조금 기다리니 음료가 나왔다. 확실히 단가가 비싸니 서비스가 다르다. 이래서 돈을 쓰나 보다. 돈을 쓰는 재미를 조금 알겠다. 음료와 함께 스푼을 주길래 젓는 시늉을 하며 직원분을 쳐다보니 고개를 끄덕인다. 아, 셰셰. 나온 음료를 한 모금 마시려는 데 웨얼알유프롬? 하며 어디서 왔는지를 물으신다. 코리아. 하고 웃으니 웰컴 투 타이완. 하며 웃으셨다. 정말 이래서 사람들이 돈을 쓰나 보다! 친절함과 다정함에 감동받았다.
음료를 한 모금 마셔보았다. 일단 섞지 않고 한 입. 레드 와인은 달았다. 살짝 포도주스 같기도 한데 그래도 알코올 맛이 느껴졌다. 그다음은 섞어서 한입. 레모네이드 맛이 워낙 강해 그냥 레모네이드 같다. 한 잔 다 비워도 취기가 올라오지 않는 걸 보니 도수가 거의 없거나 매우 약한 듯했다. 신선한 경험이었다.
내가 앉은 2층은 대략 이런 분위기. 훨씬 분위기가 좋았는데 역시 사진에는 다 담기지 않았다. 주로 노트북을 들고 와 작업하시는 분들이 많은 듯했다. 그리고 궁금하던 3층에도 올라가 보았다.
와. 그런 분위기구나. 역시 탁 트인 느낌이 좋다. 직원분께 3층 야외에서 마셔도 되냐 물어보니 난처한 표정을 지으셨다. 아마 따로 운영되는 듯하다. 그래서 사진만 찍고 후다닥 내려왔다.
음료를 다 마시고 조금 앉아 쉬다가 계산을 하기 위해 1층으로 내려왔다. 1층 바 옆쪽에 LP판이 가득했다. 카페에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아마 저 LP판들을 실제로 트시는 것 같았다. 역시 누군가의 취향이 가득한 곳은 멋이 있다.
계산을 하고 나가려는데 명함이라며 주신 얇은 플라스틱 카드를 두 장 건네셨다. 책갈피 하면 딱이겠다. 셰셰. 인사를 하고 나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인상만을 준 카페.
디화제 거리 곳곳을 구경하고 나니 벌써 6시가 다 되었다. 아까 걸어오면서 봐두었던 얀핑 공원에 잠시 들렀다가 타이베이 메인역으로 가기로 했다. 날이 맑으니 해가 지는 것도 예쁘다. 걸어서 10분 정도 가니 공원이 나왔다. 딱 해가 질 무렵이라 주황빛으로 가득했다.
대만도 선셋이 예쁘다. 잠시 멍하니 해를 바라보았다. 예쁘다. 가끔 예쁜 걸 예쁘다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어딘가 마비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예쁜 걸 보고 예쁘다 느낄 때 내 상태가 괜찮다는 것을 인지한다. 오늘은 컨디션이 아주 좋았다.
그렇게 일몰까지 보고 메인역을 가려는 데, 중간에 닝샤 야시장이 있다. 여기도 들리기로. 주로 내 여행 스타일은 이런 식이다. 갈 곳을 한 곳 정한다. 간다. 그리고 한 곳 구경을 다 하면 그 주변에 걸어갈 만한 곳으로 이동한다. 끝. 타이베이는 볼 곳이 모여있는 경우가 많아 걸어 다니기 좋았다.
걸어서 도착한 닝샤 야시장. 사람이 많아 일렬로 걸어갔다. 훠궈가 아직 꺼지지 않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딱히 먹고 싶은 게 없어 구경만 하고 빠져나왔다. 이 인파를 뚫고 먹을 자신도 없었다. 그냥 바로 타이베이 메인역으로 직행.
대만의 밤거리는 아주 화려하다. 쏜살같이 달리는 오토바이가 붉은색을 내며 달린다. 오토바이로 음식 배달을 하는 분들도 많은 것 같다. 대만은 우버이츠보다 푸드판다라는 업체를 더 많이 이용하는 듯. 대만에서 처음 봤는데, 음식 배달 하시는 분들은 거의 분홍색 푸드판다가 적힌 배달가방을 달고 다니셨다.
그리고 도착한 타이베이 메인역. 맨날 이 지하로만 다녀서 역에 올라와보지는 못했다. 인테리어가 멋지다. 서양양식과 동양양식이 오묘하게 섞여있는 느낌으로, 대만을 잘 표현한 인테리어인 듯하다. 주황 등을 쓴 것 마저.
메인역을 둘러보는데 지하에 펑리수로 유명한 썬메리가 있어 잠시 들렀다. 맛을 보고 구매하고 싶어 샘플이 있냐 물었다. 한 조각 꺼내주셔서 먹어보니, 내 입맛엔 아니다. 파인애플쨈이 별로 달지 않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겠지만 왜 유명한지는 잘 모르겠는 맛. (어디까지나 개인 취향이다.) 어제 까르푸에서 산 치아 더 펑리수는 맛있었다. 그리고 숙소 주변에 이지셩 베이커리에서 하나 사 먹어 본 펑리수도 맛있었다. 파인애플쨈이 달고 쫀득해서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내 입맛에는 이지셩 펑리수가 제일 맞았다. 내일 공항 출발하기 전 이지셩에 들러 펑리수 한 상자를 사가기로.
내일 떠나야 하기에 짐 정리도 할 겸 숙소로 돌아오니 8시가 지나고 있었다. 산 물건들을 배낭에 넣고 대충 짐을 싸고 나니 9시가 다 되어간다. 후다닥 지갑을 챙겨 나섰다. 마지막으로 야시장에서 뭔가를 사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한 마지막 야시장 메뉴. 구운 닭.
저렇게 구운 닭이 부위별로 있고, 중간에 야채나 두부 같은 것도 있다. 먹고 싶은 대로 담아 계산하면 끝. 몇 개 안 담은 것 같은데 172위안이 나왔다. 가끔 이렇다. 대만은. 방심하고 주문하면 물가가 그리 싸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
포장된 음식을 받아 주변에 공원이 있는지를 찾아보았다. 야시장 끝으로 걸어가면 공원이 있단다.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당근 주스도 하나 사서 공원까지 걸었다.
뭐야. 분위기가 너무 좋다! 마지막 날, 왜 이제 왔나 하는 곳이 한 둘이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 좋은 기분으로 여행을 마칠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난다면 여기서 아침을 먹어도 좋겠다.
그렇게 마지막 하고 싶었던 공원 산책까지 마치고 글 쓸 시간이 다 되어 후다닥 숙소로 귀환.
이렇게 마지막 밤이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