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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이륙 Sep 24. 2023

<쓰라는 대본은 안 쓰고>

(5) 오늘날 먹고살 일을 구하느라 전전긍긍하고 있었을 겁니다.

친한 후배 G를 만났다. 한참 신나게 먹고,

떠드는데 어쩐지 이 녀석 얼굴에 그늘이 있다.


"뭐야? 뭔데 죽상이야? “


"언니. 저... 이 프로그램 지원할까, 말까

고민이에요."


"지원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


"여기 팀 분위기도 별로라고 하고... 메인 언니도

무섭기로 유명하고... “


“이 정도로 말하면 그냥 하기 싫은 거 아냐?

왜 하려고 그래? “


“요즘 일자리도 별로 없고... 저 논지 벌써 3개월

됐단 말이에요!! “


3개월. 누군가는 코웃음 칠 기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연차로 페이를 받는 방송작가계에서

3개월 공백이면 죽는 줄 아는,

G 같은 후배들이 더 많다.


내 경우에는 12년 차 즈음이었던 거 같은데...

무슨 객기였는지, 잘 다니던 프로그램을

때려치우고 여행을 다녀왔다가

좀처럼 취업이 안 되는 바람에 6개월가량

논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주변 작가들에 비해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패배감,

업계에서 ‘감 떨어진 취급받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굉장히 우울한 시기를 보냈다.


그도 그럴게 지난 12년 간,

단 한 번의 공백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끽해야 다음 프로그램 넘어가는 준비 기간,

한 달 정도였나?


원래 어린 연차 때는 일이 많다.

사람이 부족해서 난리다. 대부분의 회사가 그렇다. 일반 사원이 더 많지, 팀장이 많겠는가?

이런 당연한 진리를 난 몰랐다.

어리석게도 다 내 능력 덕분인 줄 알았다.

누구보다 나이 덕을 단단히 보고 있었던 주제에.


그 부작용으로 ‘난 평생 일은 끊기지 않겠구나’,

‘이렇게만 일하면 돈은 언제든 벌 수 있겠구나’ 하는

착각에 오랜 시간 빠져있었다.


그리고 올해, 나에게 또 6개월가량 공백이 있었다.

(다행히, 글을 쓰고 있는 현재는

 새로운 프로젝트 중이다.)

한동안 자괴감에 빠지고, 우울감에 빠져

허우적 댔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빠르게 극복했다.


어떻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래의 글처럼,

3년 전에 내가 같은 일을 겪었던 덕분이겠지.

(좀 더 구체적인 극복 방법은,

 추후에 기회가 된다면 써보고 싶다)

싯다르타 : "참으로 큰 가치가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금식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금식을 몰랐다면, 오늘날 먹고살 일을 구하느라 전전긍긍하고 있었을 겁니다. 당신과 함께든, 혹은 다른 곳에서든.

왜냐하면 배고픔이 나를 부채질했을 것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지금처럼, 나는 조용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조급하지도 절박하지도 않으며,
오랜 시간 배고픔을 멀리하고,
그것을 비웃을 수도 있습니다."

- 싯다르타 / 헤르만 헤세

그리고 예전보다 덜 조급하고 덜 절박해진 나는

G에게 말했다.


“야. 3개월? 너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 60년이

넘는다. 그깟 3개월이 뭐 그렇게 대수라고.

나중에 너 60 되고 70 돼봐라.

이 3개월이 기억나나.

아이고.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3개월 좀 놀았다고 아무도 뭐라 안 해!“


그리고 그다음 주 G는

원하던 다른 프로그램에 들어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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