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침입자> 리뷰
손 놓기,라는 코드로 이 영화를 보았다.
주인공 김무열(서진)에게는 송지효(유진)라는 여동생이 있다. 어린 시절 놀이공원에서 실수로 손을 놓아 잃어버린 이후 평생 마음에서 손을 놓지 못한 채 껴안고 살았던 애잔한 혈육이다.
어느 날 그 여동생이 기적처럼 집으로 돌아온다.
가족은 경제공동체, 운명공동체로 불리는데 여동생 송지효는 집 밖에 집을 둔 인물이다. 집 밖에서 남이 준 밥을 먹고 지금껏 살아왔으니 이해관계의 기준이 집 안이 아니라 밖에 있다. 우리 곁에 이런 사람들, 얼마나 많나. 일에 미쳐 사는 남편, 아버지들, 이념이나 종교에 빠져 거기에 마음을 두고 있는 언니 오빠 혹은 나와 너들. 이 영화는 그중에서 사이비 종교에 빠진 여동생으로 캐릭터를 설정했다. 언뜻 보면 쉽게 가려는 듯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송지효는(만약 그녀가 주인공 김무열의 진짜 여동생이라면) 놀이공원에서 사이비 종교단체에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영화도 그럴 가능성을 장면으로 제시한다. 그들은 신의 제단에 바칠 참아이를 찾고 있다. 참아이라니, 순수를 믿고 주창하는 사람이나 단체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이 무서운 사람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송지효는 자신의 정신을 어떻게 해야 했을까.
종교단체가 어른이 된 송지효에게 새로운 희생양인 참아이를 찾아오라고 요구한 것을 보면 송지효가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지 짐작된다. 김무열의 어린 딸아이를 참아이로 점찍은 게 누구인지는 잘 나와 있지 않다. 송지효는 김무열의 아이를 무난하게 신의 제단으로 데려가기 위해 교통사고를 위장해 김무열의 아내를 제거하고 30여 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부모와 만난다. 유전자 검사도 한다. 김무열의 주변은 순식간에 거덜 난다. 모두 마약 먹은 것처럼 송지효의 수중으로 들어가 협조자가 된다. 김무열은 미친 남자가 된다.
그렇게 된 데에는 송지효의 언어가 주요한 역할을 한다. 그녀의 언어는 3인칭 객관의 언어다. 소위 말해 유체이탈화법. 종교집단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언어는 상실하고 자기 분열의 언어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나의 인격이라고 전제하고 보면 자기 분열의 언어란 전지적 시점의 언어다. 자신의 말은 버리고 전지적 시점의 언어를 자기 것인 양 받아들여야 살아남는 곳. 그리하여 송지효는 어떤 상황, 어떤 사람에게든 그 상황과 시점에 빙의하여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괴물의 언어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니 그들 신의 참모습은 괴물이고 악마일 수밖에 없다. 사람 깊은 곳의 약점을 파고드니 누구라도 걸리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피카소는 이미 오래 전 이와 같은 현상을 그림으로 표현한 바 있다. 하나의 화폭에서 다초점 시점을 구현하려고 하면 인간은 괴물의 모습을 면하기 어렵게 된다.
영화 <침입자>의 가장 큰 장점은 근래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와 같은 3인칭 어법을 영화문법으로 체계화시켰다는 점에 있다. 마지막 몇 분은 정말 압권이다. 몸싸움 끝에 궁지에 몰린 송지효, 모든 사람의 시점에서 언어구사가 가능한 그녀가 다급히 말한다. 그날(손을 놓았던 어린 시절 놀이공원) 오빠가 날린 풍선은 하늘색이었어. 코끼리가 그려져 있었지. 김무열은 흔들린다. 그날 동생 손을 놓친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송지효는 결정타를 날린다. 그때 오빠가 내 손만 꼭 잡고 있었어도.... 김무열이 혼미함을 느끼는 사이 송지효의 칼이 날아온다. 송지효는 그렇게 신이 되었다가 악마가 되었다가 한다.
알고 보면 3인칭 객관의 언어만큼 허술한 것은 없다. 사람이 어떻게 이 사람도 되었다가 저 사람도 되었다가 하나. 어떻게 김무열이 되었다가 예나가 되었다가 하나. 참아이로 선택된 아이(김무열의 딸 예나)가 신을 자처하면서 엄마 만나러 가야지, 하고 꼬드기는 송지효에게 한 방을 날린다. 엄마는 죽었다고 해놓고 어떻게 엄마를 만나러 간다는 거야? 예나가 예나 자신으로 돌아가 자기 자신으로 섰을 때만 볼 수 있는 진실. 1인칭 예나 시점의 언어는 얼마나 찬란한가.
마침내 벼랑 끝으로 송지효를 밀어붙인 김무열도 말한다. 그날 내가 잡고 있었던 풍선은 노란색이었어!
그러자 방금 전까지 거기(사이비 종교의 성전)가 내 집이야. 모두 다 거기로 가야 해,라고 부르짖었던 송지효는 재빨리 이전의 자신으로 갈아탄다. 오빠가 이대로 손 놓으면 평생 후회할 거야. 우리는 가족이니까. (아주 호소를 한다)
김무열은 손을 놓을까.
놓는다.
이 마지막 장면은 논쟁거리를 낳을 수도 있겠다. 가족인데, 가족이라면.... 하면서. 영화의 문법과 일상의 문법은 다르므로 일상에서는 우리가 설사 이런 경우 손을 놓더라도 영화적 결말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손 놓기를 3인칭 객관의 언어구사를 즐기는 괴물들과, 그런 언어습관과의 결별로 해석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손을 놓을 것인가 말 것인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선택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게 된다. 송지효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고 남이 선택해 준 말을 맹렬히 따라 하다가 괴물이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유체이탈화법은 지금의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병폐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