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에는 12월의 마지막 날, 지는 해를 보러 서해로 갔다. 남들은 새해의 첫해를 기념하려는 때에 뜬금없이 서쪽바다를 향해 달렸다. 미리 계획했던 일이 아니어서 해보다 빨리 바다에 닿기를 바라며 마음 급했던 그때. 서해의 노을은 붉음 이상이었다. 그 붉은 빛은 사랑도 아니고 미움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그 무엇. 아니 그 모든 것이 하나일 때의 빛깔인 듯싶었다. 시작이라고 부를 지점도 없고 끝이라고 생각할 지점도 없는 그 품속에서 오래오래 서 있는 동안, 내 안이 텅 비워졌다.
이 시를 읽은 건 그 후로 한참 뒤였지만, 시인의 목소리는 내가 서 있던 그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누구든 일몰 앞에서는 “온몸이 붉게 젖은 채 부서”지도록 빗장을 풀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석양빛에 걸음이 붙잡히지 않는 사람이라면 마음에 슬픔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아무리 마지막이라 다짐해도 소용없는 일, 그리움을 모르는 사람일거라고 믿을 때도 있다. 내게 일몰은 곁에 없는 네 손이라도 생각하며 견뎌야 하는 시간이니까.
아무려나 나는 시인이 본 서쪽 노을은 어디쯤일까 상상하면서, 오늘도 바다가 아니어도 이 세상 어디든 ‘노을 대합실’을 열어줄 때를 기다릴 것이다. 늘 어디론가 흘러가는 삶의 길에서 낡은 신발을 벗고 마음을 덥히는 노을 대합실. 그러나 밤이 오면 사라지는 그 노을 대합실을 기다리면서, 노을 대합실이 열리는 그 잠깐 사이는 모두에게 똑같이 공평하다는 게 위안이 된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빨래를 걷던 베란다에서거나 버스 정류장에서거나 강물 곁에서거나 가릴 것 없이 하늘이 붉어지면 하던 일을 멈추고 함께 붉어져 보기를. 아련하게 아픈 듯 슬픈 듯 그리운 듯, 서로 번지며 섞여서, 떨림과 불안이 나누어지지 않는 이때, 그 무엇보다 나에게 다정해지기를. (이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