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면 깨끗한 새 옷을 입듯 마음이 새로워지겠지 기대했는데 어쩐 일인지 무기력과 소란에서 벗어나지지 않는다. 갱년기에 접어든 몸 탓도 하고, 사람 사이의 온도와 거리 탓도 하고, 괜한 날씨 탓까지 하다가, 내 상식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정치와 세상에 대한 염증에 닿으면 어떤 대답을 찾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진다.
그럴 때, 아무 힘없는 내가 들 수 있는 작은 방패는 고요와 적막이 가득한 시 한 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시인의 걸음을 따라 조용히 “인간세(人間世) 바깥”인 듯한 곳으로 가는 것이다.
나무와 돌의 묵묵한 태도가 사람들의 말보다 따뜻한 곳.
짊어진 배낭보다 무거운 마음으로 닿아도 넌 세상에서 쫓겨 온 게 아니라는 위로가 있는 곳.
그리고 마지막엔 세상 속으로 다시 돌아갈 까닭을 딱히 찾지 못해도 살며시 등 떠밀어 다음을 약속해 주는 곳.
만약 그런 곳을 찾는다면 나도 시인처럼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을 테다. 인간의 마을을 떠돌던 햇살도 가끔은 찾아와서 머리를 식혀 가는 곳이라면, 자진자진 바람에 말라가는 나뭇잎으로 돌아 나오는 그 길을 다 덮어두고 와야지. 아주나 잊어버리지는 않게 돌이나 몇 개 놓아두고. 아무도 모르게 비밀한 사랑을 만나러 가는 듯이 그렇게 다녀올 거다.
그곳에는 고작 낡아가는 풍경만이 있을 테지만 어떤 이들은 미움을 물소리로 바꾸고 어떤 이들은 슬픔을 바람으로 바꿔갈 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꿔 온 그것으로 내 안의 연약한 것을 또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김없이 한 해가 흘러가는 동안, 살다가 이렇게 잠시 들러 눈과 마음을 쉴 곳이 있다면 이 또한 얼마나 다행일까. 이런 일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는 사람들과 차곡차곡 하루를 살아내는 이들이 그 누구보다 평안한 시절이 되면 좋겠다. (이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