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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운진 Jul 12. 2024

‘여행자’가 되어



     시를 쓰는 동안 나는 잠시라도 여행자가 된다. ‘여행자’라는 존재가 현실의 내게는 꽤나 어려운 일이라서 그럴까. 시집 속에서 만큼은 꼭 여행자인 나를 그려 넣는다. 그렇게 세 권의 시집에서 나는 조금씩 다른 여행자가 되었고, 대략 10년 동안의 내 삶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여행자인 내 모습도 바뀌어갔다. 그 변화의 방향과 모습을 보다보면 내가 흘러가고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 조금 헤아려지기도 한다. 북극을 떠돌고 싶어 하던 나를, 그럼에도 운명과 이 모든 관계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내가, 마침내 무엇에 기대 마음을 가볍게 만들고 있는지……

     끝내 정답을 찾지 못했어도 적어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이 나에게 얼마나 솔직했는가가 중요한 것이었으니 나는 괜찮은 여행을 했다고 생각한다. 아무려나 상처를 치유하기 보다는 어떤 것은 시간에 묻고, 어떤 건 가진 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만들어주는 것. 내가 시 속의 여행자로 사는 이유인지 모르겠다.              

       



북극 여행자

-이운진          



늘 그래 왔듯이

몇 개의 강과 몇 개의 구름으로는 나를 달랠 수가 없었어     


한 계절 한 계절씩

다른 옷을 갈아입는 일로는 나를 바꿀 수 없었어    

 

눈을 감으면 멀리서

작은 짐승이 혼자 눈을 밟고 가는 소리     


보름달이 뜨면

길 잃은 늑대의 휘파람 소리

사람의 말을 배우지 않은 북쪽 숲의 바람 소리가 나를 불러서     


새들의 하늘 지도를 빌려

열흘 낮 열흘 밤

이미 그곳에 있는 나에게로 갔어  

   

나는 혼자일 때 가장 덜 외로웠으니

나는 사랑이라는 발음이 아주 서툴렀으니     


광활한 얼음 벌판에서

풋사과 빛 오로라처럼 너울거리고 싶었어   

  

별에서 슬픔이 날아와 내게 안길 때

무엇에서 시작되든 슬픔으로 끝나는 나의 시를

다시는 고치러 돌아가지 않기로 했어   

  

내가 반성할 것이라고는 슬픔뿐이고

그 슬픔마저 없으면 나는 정말 혼자가 될 테니까     


그리고 기억이 나를 조금씩 속여 줄 거야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2015.  

   

       



여행하지 않는 여행자

-이운진    


           

나는 방금 햇살 속에서 돌아왔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이 창문에서 저 창문으로 옮겨가는

햇살만 따라다니다 돌아왔다

    

하늘이 녹아드는

세상의 가장자리로부터

푸르른 빙하와 외로운 섬을 지나

이름 없는 무덤가에 꽃을 피워주고 온 햇살    

 

아무 풍경이 없는 풍경에 대해서도

긴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햇살처럼

멀리 있어서 영영 잃어버리지 못하는 것들을 생각했다    

 

햇살과 함께

걸을 수 있는 만큼 걸어갔을 때에는

나에게 오는 길을 끝까지 다 오지 못한 이들과

다정하게 헤어져 주었다   

  

오늘도 나는

비둘기 한 마리와 고양이 한 마리보다도 멀리 가지 못하고

기억한 것보다 더 많이 잊어버리며    

 

햇살 속에 가만히 잠겨 있다가

절반쯤만 돌아왔다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2020.


     



마음 여행자

-이운진      


    

남겨지는 게 아니라

한 번쯤은 내가 먼저 떠나보고 싶어서     


단단한 공기로 세운 벽들과

신의 숨결보다 길지 않은 계절을 벗어나고 싶어서    

 

벚꽃 지는 저녁

눈을 감고

작은 꽃송이와 함께 가볍게 날아가면,  

   

바람이 흘러갈 때 밤과 낮이 흘러가고

꽃잎이 부서질 때 너와 내가 부서지고   

  

체온이 녹아 생이 되는 건지

사랑이 녹아 영혼을 덥히는 건지

     

허공을 받아들인 후에야 알게 되는 아름다움 때문에

우주의 아득한 두께도 두렵지 않다  

   

눈빛이 다 식고

사람이 다 멀어지도록

마침내 내 심장이 별의 먼지와 같아질 때까지

외로움은 내가 떠다니는 바다일 테니    

 

벚꽃 지는 저녁

세상이 잠시 멈춘 듯한 사이   

  

무언가 영원히 나를 지나가버려도

그 무슨 작정이 필요 없다    


      

―『져녁 잎사귀처럼 알게 될 때』.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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