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의 주인은 나야나! 나야나!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익숙한 감각이다.
‘하, 또 얼굴이 빨개지는군. 제발 포커페이스좀 해!’
새로운 조직에 입성한지 꼬박 두 달째. 처음 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서 잘 어우러지도록 부지런히 노력하는 중이다. 지금부터 보여지는 나의 말과 행동이 곧 내 이미지가 될터. 그렇기에 매우 조심스럽다. 어떠한 자극이, 일이 닥쳐올지 모르는 물음표가 가득한 시간이 계속되기에 언제나 긴장상태다.
조연출, 인턴기자부터 시작해 사회인으로서 조직생활을 한지 10년이 넘는다. 아일랜드에서 일할 땐 현지 직원들을 제치고 우수 직원상도 받았고 한국에선 특진은 아니어도 인사평가 점수를 곧 잘 받아 제때 승진했고 큰 잡음없이 회사생활을 해왔다.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무리없이 새 조직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을거라 생각한 이유다. 그렇게 스스로를 믿었다.
그런데 자꾸 그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명령조의 업무지시, 흔히 기싸움이라 생각되는 동료의 원색적인 말들.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과 자극에 어찌할바를 모르는 것이다. 처연하게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괜한 자극에 혼란스러워하는 시간들이 많아진다. 동요되는 나에게 실망하고 그동안의 ‘짬바’는 내다버렸냐며 허탈해하곤 한다.
‘겨우 이런 일로 상처받아?’
‘넌 아직 멀었어’
‘왜 항상 동요되는거야? 조금 침착해져봐’
타인에게 받은 부정적 자극으로 ‘나’는 나에게서 분리되어 ‘나’를 2차 가해한다. 단단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화를 내고 결국 불완전한 존재로 낙인해버린다. 언제나 그렇듯이. 작은 자극에도 처연하지 못하고 금세 동요되며 곧 슬퍼지는 것이다. 제 3자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상처받은 나를 손가락질한다. 칭찬보다는 비난, 격려보단 원망, 성취감보단 당연함. 네거티브한 프레임으로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에 익숙하고 기쁘고 행복하고 성취로 가득찬 나는 외면시 한다.
며칠 전, ‘벚꽃동산’이라는 연극을 보았다.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동명 희곡을 한국버전으로 재해석한 작품인데 영국의 유명한 연출가 사이먼 스톤이 연출을 맡고 배우 전도연의 연극복귀작으로 화제가 된 작품이다. 한 개의 세트장에 열 명의 배우가 모두 등장하는 씬이 극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배우 A와 배우 B가 대사를 주고받는 동안 다른 배우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다양한 연기를 한다. 설거지를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그 움직임들이 꽤나 재미있어서 대사치는 배우를 보기보다, 저변에 위치한 배우들을 관찰하며 연극을 즐겼다. 이를 두고 사이먼 스톤은 ‘대사를 치고 있지 않는 인물도 내가 원한다면 지켜볼 수 있는 게 연극의 매력이다. 만약에 좋아하는 배우가 있다면 관객은 그날 밤 내내 전도연이라는 배우 한 명만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선택이 열려있고 이런 점에서 연극은 본질적으로 민주적인 예술 장르다.’ 며 ‘바로 나만의 모험을 나만의 방식대로 떠날 수 있는 자유가 관객에게는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극의 여운이 꽤 깊게 남아 구매한 ‘벚꽃동산’ 프로그램북에서 연출가의 이 말을 보자마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 문장 그 자체로도 꽤 인상적인 문장이었지만 어쩐지 지금의 내 모습을 투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상사에 적응하지 못해 안절부절 못하는 나, 말 한 마디에 상처받는 나, 옆자리 동료의 소소한 과자선물에 기뻐하는 나, 회사에서 무사히 하루를 마무리했다며 안도하는 나. 하루에도 무수히 많은 내가 동시에 움직이고 있고 그것을 오롯이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졌음에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부정적인 ‘내 모습’만 관심을 기울이는 내가 떠올랐다. 다양한 나를 발견하고 잘 들여다 봐야 나만의 방식으로 내 삶을 잘 꾸려갈 수 있을 것이다.
연극에서 ‘벚꽃동산’은 주인공 집안의 번성, 그리고 정체성을 상징한다. 나만의 ‘벚꽃동산’을 잘 가꿀 수 있도록, 그리고 극과는 달리 그것이 훼손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임을 언제나 새겨야 할 것이다.
(2024.07.09 작성글을 퇴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