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0에 70년짜리 기억을 삽니다.

프롤로그

by 관광학도

아프리카에서 군복 입고 땀 흘리며 1년간 번 돈, 직장에서 기름때 묻혀가며 2년 반 동안 모은 돈. 내 전재산 3500을 70년짜리 기억과 교환했다. 그러니까, 구매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정확한 시작점을 알 순 없지만 이번 ‘지출’ 관련 내 기억의 첫 부분은 초등학교 때 읽은 ‘70일간의 세계일주’다. 책은 언제나 두근거리는 신비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었기에, 그 문을 타고 시간과 재화의 한계를 넘어 이 세상 저 세상 탐험을 다니곤 했다. 그중 하나가 열기구를 타고 전 지구의 다양한 나라들을 탐험하는 세상이었고, 상당히 즐거운 여정이었던 것 같다. 정확히 여정의 내용이 기억나진 않지만, 꽤 오랜 과거의 기억임에도 여전히 설렘과 긴장감이 뒤섞인 미소가 입가에 남는 걸 보면 말이다.


그 이후, 한동안 방치되었던 ‘지출’ 관련 기억은 중학교 시절에 다시 섬처럼 그 흔적이 남아있다. 당시 막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SNS가 퍼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얼리어답터들, 즉 ‘인싸 무리’가 먼저 깃발을 꽂고 페이스북을 보급화 시킬즈음, 평범한 학생이었던 나도 슬그머니 가입을 했고, 그때 처음 ‘여행에 미치다’라는 여행 관련 채널을 접하게 된다. 꽤 핫한 채널이었고, 외국의 동화 같은 풍경들이 꽤 자주 올라오는 페이지였다. 더는 이용하지 않아 먼지가 앉은 내 페이스북 계정을 열어 내려보면, 지금도 저 아래 구석 즈음 ‘나만 보기’로 공유해 놓은 동유럽의 동화 같은 풍경들이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머릿속으로 그려놓은 스케치 정도의 ‘지출’이 또렷한 사진으로 거듭난 순간이었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남고에 진학한 고등학교 시절, 질식할 듯 교실을 가득 채운 테스토스테론으로도 호흡이 가능함을 슬슬 깨닫기 시작할 무렵, 7살 차이의 큰형이 군대를 전역하고 유럽배낭여행을 다녀왔다. 새벽마다 노래방 알바를 나가는 것 같더니, 조금씩 모은 돈으로 친구와 약 2주 정도 유럽여행을 다녀왔단다. 어릴 때 자동 장착되는, 큰형이하는 건 다 멋져 보이는 ‘형아 필터’가 아직 다 벗겨지기 전이었는지 그게 참 멋져 보였다. 본인이 원하는 걸 하기 위해 온전히 본인의 노력으로 그 대가를 지불했다는 점이 멋져 보임과 동시에, 매일 세끼를 나와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던 평범한 사람이 그것을 해냈다는 사실은, 내게도 ‘지출’ 관련된 것을 2D에서 3D로 끌어내기 충분했다. 더 이상 나와는 다른 세상인 2D가 아닌, 나의 세상에도 존재하는 3D로 한층 가까워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 인턴을 약 6개월간 했다. 큰 형이 했던 그게 그렇게 멋져 보여서 나도 했다. 단순히 유럽여행 말고, 내가 번 돈으로 유럽여행을 가는 것. 그래도 은근히 형보다 잘나고 싶은 마음에 난 혼자 여행을 다녀왔다. 형은 친구와 둘이 갔는데, 난 혼자 갔으니 내가 더 대단함ㅋ 입대 약 2주 전까지, 약 42일 정도 여행을 다녀왔다. 감히 짧은 동화책 속에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스위스의 그것은 정말.. 아직까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모든 것이 돋보기 렌즈로 들여다보듯 너무나 선명하고 진했다. 그곳 풀들의 초록이 내 발에 느껴졌고, 바람이 몸을 훑었다. 내가 존재하는 세상에도 실존하나 싶었던 ‘그것’이 마침내 나의 육체에 와닿아 내 삶 안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초등학교 이후 꽤 오랫동안 동화책을 읽을 기회가 없었다. 동심이 바래가면서 자연스레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출입문은 잠기게 되었고, 꽤 오랜 기간 내가 속한 한 가지 세계에서만 살아가게 되었다. 뭐, 조금 건방질 수 있지만 나름 치열하게 살아냈다. 뒤돌아봐도 후회가 남지 않을 만큼. 삶에 대한 이야기까지 넘어가게 되면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질 수 있으니 라떼 얘기는 접어두기로 하자. 한동안 잊고 지내던 동화 속 세상을 동심 대신 비행기 티켓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꽤 자주 그곳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나 불침번이 생기고, 휴대폰이 사라진 세상에서는 그곳을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 이상으로 넘쳐났기에, 갈망은 더더욱 커지게 되었다. 가고 싶은 나라들의 리스트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고,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은 결국 초등학교 때 잠시 갔다 왔던 그 열기구의 세상까지 닿게 되고 말았다. 초등학교 저학년의 꿈이, 만 19세가 넘은 성인의 권리를 만나게 되면, 어.. 그리고 거기에 몇 가지 우연이 더해지게 되면, 결국엔 ‘지출’이라는 것이 발생하고 만다.


몇 가지 우연이라 함은.. 국토종주, 해외파병, 대학 대신 선택한 취업, 그로 인해 또래보다 조금 더 여유 있는 자금 사정 등등..


어쨌든, 그래서 평범한 스물다섯 사내 녀석에게 3500만 원의 ‘지출’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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