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심리상담을 할 자신은 없었다. 다만, 미국 규정상 3000시간의 현장 경험 없이는 상담가 자격을 취득할 수 없기 때문에 살고 있는 미국에서 취업을 해야 했다. 문제는 나의 영어 실력이 미국인 친구들의 농담을 때로는 이해하지 못한 채로 분위기상 적당히 웃기도 하는 수준이라는데 있었다. 내담자의 말에 담겨있는 미묘한 뉘앙스를 정확히 파악하고 반영하는 것이 기본 역할인 상담직에 과연 언어 한계가 있는 외국인을 고용할까 싶었다. 그래도 이 큰 나라에 회사 한 곳 정도는 내게 기회를 주겠지 믿고 있었다.
100여 개의 이력서를 제출했고 면접 기회가 주어진 것은 2번이었다. 그중 한 면접을 통과하여 캘리포니아 대형 병원에 합격했다. “이게.. 되네?” 나조차도 확신이 없었던 일이 실현되자 온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다. 소식을 들은 가족과 친구 모두 함께 기뻐해줬다. 회사에서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하며 며칠을 보냈다. 그리고 해당 병원에서 연락을 받았다. 짧은 메시지였다.
‘사정상 고용 결정을 취소합니다.’
그 사정이 뭔지 설명 하나 없이 고용 결정을 철회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내가 지원했고 나를 고용한다고 했으나 취소했던 바로 그 포지션이 다시 병원 웹사이트에 공지되었다. ‘아, 당분간 공석으로 둘지언정 나는 고용하지는 않겠다는 건가?” 한동안 나는 커튼이 걷히지 않은 불 꺼진 방에서 아침이 지나고 오후가 되어도 나오지 않았다. 2주 뒤에 더 황당한 일이 생겼는데, 해당 병원에서 ‘혹시 아직도 관심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일해보겠냐’는 메일을 보낸 것이다. 이게 미국 대형 병원의 행정 수준인가 싶어 실망스러웠고 그 태도가 불쾌했다. 나는 그 회사에서 일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결국 다시 도서관에 앉아 기계처럼 지원서를 작성했다. 내가 몇 회사나 지원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즈음에 한 회사에서 면접을 제안했다. 아동학대, 성학대, 가정폭력 피해자를 위한 상담소였다. 내가 상담가로서 하고 싶은 모든 일의 집합체 같은 곳이었다. 면접 예상 질문과 답변을 영어 단어와 문장 그대로 외우면서 면접장을 들어섰다. 그때 무슨 정신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그래도 면접 가는 길에 보았던 노란 유채꽃으로 뒤덮인 언덕과 동네의 연홍빛 건물 지붕들을 보면서 ‘동네가 참 예쁘네.. 이번엔 될까?..’ 생각했던 순간은 아직도 선명하다.
면접을 보고 몇 주 뒤, 동네에 하나뿐인 떡볶이 가게에 앉아 김밥과 떡볶이를 먹으려던 참이었다. 핸드폰에 새 이메일 수신 알람이 울렸다. 면접 본 그 회사에서 보낸 공식적인 근로계약서였다. “됐다!” 안도와 성취감에 웃다가 이내 얼굴을 가리고 한참을 소리 없이 울었다. 그간 미뤄두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미국에서 나를 고용해 줄 곳은 그래도 한국인 관련 상담소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나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곳에 취업을 했다. 회사 백여 명의 직원 중 나는 유일한 아시아인이었고 단 한 번도 내 한국어가 상담에 사용된 일은 없었다. 개인 상담소를 운영하는 현재도 내게 상담을 받는 내담자의 95%는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이다. 나는 오랫동안 의아했다. 왜 영어가 제한적인 나에게 상담을 신청하는지 말이다. 내담자와 이야기하면서 이해하게 된 바로는 자신의 문화권 밖의 상담자가 오히려 자신의 이야기를 편견 없이 수용해 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인 것 같다. 실패의 원인이라 여겼던 나의 한계가 오히려 디딤돌 역할을 해주고 있다니 참 모순적이면서 재미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