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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나 Mar 20. 2023

엄마의 뜨개 이야기

엄마의 첫 번째 뜨개방

어제 샤워를 하면서 문득 엄마의 첫 번째 뜨개방이 생각났다. 엄마가 뜨개방을 오픈하기 전에는 집에서(편찮으셔서 일을 하지 못하는 아빠를 대신해서..) 골프채 커버 주문 제작 판매로 생계를 이어갔다.

손으로 뜨는 것에 한계가 있고 힘들다 보니 수편기도 배우셔서 수편기로 골프채 커버를 만들기도 했었다. 쓱쓱쓱쓱 꽤나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 수편기에 실이 여러 올 걸려 있고 엄마 손이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가지런하고 예쁜 메리야스 편물이 짠하고 생겼다. 수편기에서 무늬를 넣을 때 무늬를 넣어야 하는 부분에 실 올을 쭉 풀어 바늘로 걸어 올리며 무늬를 만들던 모습도 떠오른다. 수편기로 뜨면 쉽게 될 줄 알았는데 수편기는 편물을 빨리 고르게 만들어 주지만 시작과 끝 과정에는 또 잔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엄마가 힘들다 하면 내가 수편기를 몇 번 밀어주고는 힘들다고 금세 포기하고 내 할 일을 하곤 했다. (은근 힘이 많이 들어간다.) 잊고 지냈는데 문득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의 엄마는 지금 내 나이와 비슷했는데 엄마의 탱글탱글하고 예쁘고 고운 피부와 뜨개 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 엄마 지금도 참 예쁘지만 그땐 정말 더 예뻤었는데...

보편적으로 뜨개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흔들의자에 돋보기 쓴 할머니가 벽난로 앞에서 아름답게 여유롭게 뜨개 하는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내가 어릴 때 본 뜨개는 현실이고 삶이고 전투적이었다. 엄마는 생계로 뜨개를 이어가야 했기에 많은 주문을 받아야 했고 밤낮없이 엄마 노동력으로 뜨개를 했었기에 늘 바빴다. 주문량이 많을 때는 중학생이었던 나도 장갑바늘 4개를 잡고 엄마의 뜨개를 도와드리기도 했다. 집에서는 실과 부자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아름답게 차곡차곡이라기보다는 난장판이었다. (앗, 엄마 미안..;;) 엄마는 늘 엄마 자리에 앉아서 살림하는 시간 외에는 계속 뜨개하고 수놓고 태슬 폼폼이 만들고 계셨다. 그렇게 주문 제작을 하다가 IMF를 맞이하면서 골프를 치는 사람들은 줄고 주문도 당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여성회관에서 게이지 및 제도에 대해 수업을 더 배우시고 뜨개방 창업을 했다. 그리고 그 후로 엄마가 여성회관 선생님 되었다. 그 시절 즈음 일본에서 보그 과정 유학할 기회가 왔지만 돈과 시간이 많이 투자되고 몸이 불편했던 엄마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보그 과정이 우리나라에 보급되던 시기였던 거 같다. 엄마가 그때 일본에서 공부를 했었더라면 엄마의 인생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그 시절은 나도 오빠도 공부를 했어야 했기에 엄마는 더더욱이 공부와 도전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엄마가 요즘 시대에 태어났었다면 뜨개로 아주 성공했을 거 같은데 엄마의 손 땀과 기술 섬세함과 창의력이 너무 아깝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뜨개 책이 많았던 이유를 이 글을 쓰면서 알았다. 엄마가 이때 뜨개방을 오픈했구나.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엄마는 뜨개방을 창업하기로 했고, 월세가 부담스러웠기에 첫 번째 뜨개방은 내 친구 엄마가 운영하는 홈패션 가게에 일부를 세를 내고 가벽을 설치해서 3평 ~4평 정도 되는  공간에 뜨개방을 차렸다. 넓지는 않았지만 아늑했고 한쪽 벽면 가득 실장과 몇 명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전부였지만 엄마에게는 새로운 도전과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화장실도 냉난방도 다 힘들고 불편했지만 내 기억 속에 그 공간은 항상 복작복작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나이 든 어르신들이 뜨개방에 오시면 아줌마 저기요 하고 불렀는데 젊은 새댁 수강생들이 오면서 선생님이란 호칭이 자연스럽게 불리게 되었다고 했다. 엄마가 선생님이 된 것이다!! 왜 내가 뿌듯하지?! 엄마도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꽤 마음에 들고 좋았던 거 같다. 활짝 웃으면서 선생님이라고 부른다고 좋아하셨던 모습, 엄마 선생님이 된 것을 축하한다며 오빠와 내가 박수 쳐주고 함께 좋아했던 그 장면이 떠올라 마음이 뭉클해진다.  엄마는 처음에는 뜨개방을 차려두고도 사람들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많이 왔으면 좋겠지만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그 마음이 뭔지 이제 정확하게 안다. 너무 설레지만 막상 사람을 상대하고 설명을 하는 일이 두려웠을 것이다. 내가 아주 어릴 때 홈클래스도 하셨지만 그때는 완전 주먹구구식 취미 뜨개 재능기부 수준이었고, 정식으로 공부를 하고 차린 첫 번째 뜨개방이었기에 더 부담감이 컸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차곡차곡 엄마의 수강생들을 늘어갔고 엄마는 매일이 감사하다 했다.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라 출퇴근도 힘들지 않았고 나도 엄마 뜨개방에 종종 놀러 가곤 했다. 엄마와 나의 가장 큰 다른 점은 엄마는 일 뜨개를 하면서도 그렇게 뜨개가 늘 즐겁고 행복했다고 한다. 나는 순간순간 뜨태기도 만나고 슬럼프도 겪었는데 생각해 보면 엄마는 힘들다는 얘기를 진짜 하지 않았다. 이렇게 기록을 하다 보니 엄마가 더 존경스럽고 멋지다. 어릴 때는 몰랐다. 엄마는 당연히 그렇게 사는 건 줄 알았다. 나는 비록 자녀가 없지만 살림과 일을 병행하는 것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도시락을 몇 개나 싸고 살림을 하면서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퇴근하는 뜨개방 운영을 오래 하신 것이 정말 대단하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 내가 뜨개를 일로 하면서 엄마 마음을 더 잘 알게 되었다.

때로는 조용히 공부하고 싶거나 집에 손님이 오는 날 혼자 엄마 가게에서 공부를 하기도 했고 혼자 뒹굴뒹굴하면서 놀았던 기억도 있다. 엄마의 공간이었지만 나만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엄마가 뜨개방을 하면서 큰 핸드폰을 처음 샀었는데  엄마 핸드폰 몰래 들고 엄마 뜨개방에 셔터 내리고 전기장판 위에서 귤 까먹고 뒹굴뒹굴 놀면서 친구들한테 문자 보내고 놀았던 기었도 떠오른다. 추억의 공간이다.

엄마의 첫 번째 뜨개방은 아주 작았지만 아주 큰 공간이었다. 엄마의 새로운 삶이 펼쳐지고 시작되었던 곳. 엄마가 좀 더 넓은 바깥세상에서 많은 사람을 마주하고 소통했던 곳. 엄마의 꿈이 실현됐던 곳.

아,, 나는 모태신앙이고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은 사람이지만 지금은 냉담 중이다. 엄마의 세례명은 '엘리사벳'이다 엄마의 뜨개방은 그래서 "엘리 뜨개방"이었다. 엄마를 똑 닮은 딸인 나는 "피나의 소소한 즐거움"으로 공방을 시작했다. 엄마의 인생을 닮되 엄마 삶에서 힘들고 아쉬웠던 부분은 내가 잘 채우고 극복하며 나는 "필리아 니트"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엄마의 꿈까지 더해 이루어 내고 싶다. 엄마랑 꽤 많이 닮았지만 또 꽤 다르기도 하다. 엄마의 삶을 닮아가지만 엄마가 힘들었던 부분을 나는 똑같이 겪지 않으려 더 애를 쓰며 살고 있다. 나의 성장이 엄마에게도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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