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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이 드는 숲 Jan 18. 2024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생애 딱 한 번

수업을 빠진 적이 있다.

 

 

   지금도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생애 딱 한 번 수업을 빠진 적이 있다.

   스무 살 어느 평일 오후, 전공 수업을 빠지고 꽤 긴 학교 언덕을 내려가는 길에 느꼈던 감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소심한 탓에 뒷일에 대해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멋대로’ 해볼 수 있는 첫 기회에 대한 흥분으로 뛰는 소리가 더 우렁찼다. 와우산로 골목 카페를 갈까, 얼얼하도록 매운 것을 먹어볼까. 청파동 언덕을 따라 머릿속으로 쓰고 지운 계획의 실타래가 굴러갔다. 그렇게 향한 반항의 장소는 어디였을까.

 

   “2시에 시작하는 것으로 주세요.”

 

   아무리 평일이지만 영화관은 고장 난 두더지 잡기 게임기처럼 좌석이 텅 비어있었다. 그렇게 내 처음이자 마지막 반항의 장소는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상영하는 영화관이었다. 이 영화를 보려고 수업을 빠진 것은 아니었지만 즉흥적으로 생긴 시간에 가장 마음과 발길이 가볍게 닿았던 곳이었다. 영문학도답다고 이야기할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영미문학입문 수업도 버거워하던 고작 1학년이었다. 그저 미국이나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의 분위기를 좋아했을 뿐. 기억난다. 몇 없던 그때의 관객들도 꾸벅거리거나 결국 잠들었다. 최후의 반항의 요새가 되어줄 만큼, 안식이 필요할 때마다 나는 왜 시대극을 찾게 되는 걸까?

 

   피아노나 현악기 선율을 따라 천천히 자연이 담기고 그 여백 속에 여러 인물들이 담기는 게, 인물과 구조물들이 가득 찬 장면들이 초 단위로 빠르게 지나가는 현대극에 지친 내게 여유를 준다. 이는 영화, 오만과 편견(2006)과 Heyday Films에서 제작한 청춘의 증언(2015)을 보면 누구라도 느낄 수 있다.

 

   몇 겹의 불편한 양복과 드레스를 입고도 창문 너머로 지나가는 상대를 보는 순간 계단을 묶음 단위로 뛰어가 한 발 앞선 곳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우연히 만난 척 무심하게 한 마디 던지는, 그러나 한 마디마다 긴장한 숨을 감출 수는 없는 그런 장면이 순수한 설렘을 준다. 성별, 인종, 계급의 삼위일체(Trinity of Gender, Race and Class). 누군가는 시대극이 현재에 없는 조건들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몰입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쩌지, 그래서 더 좋은데. 남녀가 유별했기에 긴장감 속에서 주고받는 언어, 비언어적 표현들은 시인이 신중하게 고른 단어와 문장처럼 아름답다. 인종과 계급의 한계로 인물들이 겪는 고뇌와 치유의 연속은 몇 백 년 동안 물들어 현시대에도 자국이 남아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영화, 작은 아씨들(2020)에서 주인공 네 자매의 아버지는 과거 노예제로 부를 축적한 본인 가문을 대신해 남북전쟁 전선에 가서 싸운다. 그 시대에도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실천한 사람들은 궁핍했고, 뻔뻔하고 꼿꼿한 사람들은 부를 이어갔다. 이렇게 시대극은 ‘다른’ 매력으로 빠져들어 엔딩으로 검은 화면이 나올 때쯤에는 ‘같은’ 고민을 하게 한다.

 

   수준이 있는 취향을 가진 듯 앞서 이야기했지만, 사실 영화가 나를 (사정없이) 몰입시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글 쓰는 인물이 주인공이면 된다. 청춘의 증언(2015)에서는 유럽 전쟁의 혼돈이 아직 닿지 않은 작은 시골에 사는 지적이고 시를 좋아하는 주인공 베라가 등장한다. 남동생의 친구, 롤랜드와 시를 통해 교감하게 되는데 어느 날 숲 속에서 그는 사랑 고백처럼 말한다. 이 장면을 돌려 보고 또 돌려보다가 결국 608장의 소설 원서를 주문해 책장 위에 올려놓고 낮이고 밤이고 그 장면 속 베라가 되어 본다. 베라처럼 글을 쓰기 어려운 시대적 장치가 현재는 없지만, 여전히 글을 내보인다는 것은 두렵고 망설여진다.   

 

   “내가 작가가 되고 싶다면? 글을 써서 먹고 싶다면?”

   “넌 글을 써야 돼. 진심이야.”

   “그런 말 처음 들어봐.”

 

   작은 아씨들(2020)의 둘째 딸 조는 누군가의 독려 없이도 당차게 결혼 보다 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같이 티격태격하며 성장한 로리가 언덕에서 사랑한다고 말할 때도 아픈 거절을 하고 작가가 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난다. 몇 년 후 신랄한 비평에 충격을 받은 차에 여동생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첫째 언니 메그의 결혼, 막내 동생 에이미의 결혼을 위한 여정과 부재, 결국 맞이한 셋째 동생의 죽음으로 조는 본인을 채우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 같아 두려워 어머니에게 토해내듯 고백한다. 물론 조의 로리에 대한 사랑은 일시적 상실감에 대한 충동에 가까웠지만, 관습을 깨고 외로운 길을 가는 인물의 마지막 대사, “그런데 너무 외로워요”가 내 혀끝에서 맴돌았다.

 

   [어머니] 그 애를 사랑하니?

   [조] 다시 물어 오면 그렇다고 할 거예요. 다시 물어볼까요?

   [어머니] 근데 네가 사랑해?

   [조] 전 사랑받는 게 더 중요해요. 사랑받고 싶어요.

   [어머니] 사랑하는 것과 다른 거야

   [조] 알아요. 제가 느끼기엔 여자도…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영혼이 있고 외모만이 아니라 야심과 재능도 있어요. 여자에겐 사랑이 전부라는 말에 신물이 나요. 지긋지긋해요! 그런데 너무 외로워요.

 

   뉴스에서는 ‘비혼’, ‘저출산’을 큰 문제로 다루며 심지어 결혼을 원하는 서른 하나의 내게도 부채감을 준다. 할머니, 어머니부터 이어온 관습대로 살기에는 그들도 인정하는 삶의 얼룩이 너무 많다. 할아버지, 아버지부터 이어온 가장의 무게를 보고 자란 지금 세대는 곪을 걸 알고 생채기를 낼 만큼 어리석지 않을 뿐이다. 그럼에도 결혼을 선택하는 청년들이 역설적이게도 이 시대의 ‘조’가 되어버렸다. 몇 조 단위의 정부의 지원 좋다. 하지만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현실적인 문제 앞에 홀로 맞서야만 하는 이 시대의 조들의 목소리를 사회 전체가 듣고 공감해줘야만 한다. 아직도 내 혀끝에는 맴돌고 있다.

 

 

 

끝맺으며,

2024년 1월 17일 일주일 휴가를 받은 날

나는 여행 보다 글쓰기를 선택했고, 눈이 오는 창 밖 풍경을 보며 백색의 직사각형에 나눔명조체로 가지런히 흑색을 채워가는 이 선택에 감사한다.

 

 

 

청춘의 증언(2015)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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