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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이 드는 숲 Jul 06. 2024

결혼을 앞두고 망설여지는 것은 누구나 겪는 일일까?


결혼을 앞두고 망설여지는 것은 누구나 겪는 일일까?

왜 지금 와서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감정에 의심을 품는 걸까.


지금껏 연애하면서 나는 꽤 자신했다, 내가 원해서 사랑하고 감정에 솔직하고 충실했다고.

이번 연애도 처음에는 그런 자신이 있었다. 내가 상대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잘 모르겠다. 정확히 말하면, 상대를 향한 감정이 사랑인지 모른다기보다는 더 근본적으로 내가 사랑을 아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조심스럽게, 나는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을 살며 반쯤 ‘헛’으로 연애를 하고 사랑의 방식을 알아왔다고 느낀다.


항상 내 연애의 처음은 같았다.

상대를 먼저 좋아한 적이 없었다. 상대가 좋아하는 마음을 아낌없이 보여줄 때 서서히 마음을 열었고, 헌신의 빈도만큼 상대를 신뢰하고, 좋아하고, 사랑한다 생각했다. 예상 가능하게도, 내 마음은 상대의 헌신을 먹고 커졌기에 그가 연애 초심을 잃었다 싶으면 나의 불안 방어기제는 작동했다.

그리고 항상 내 연애의 끝도 같았다.


“역시 그렇지. 나는 혼자가 더 좋아.”


상대의 마음이 변한 듯해도 초연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내 모습이 꽤 멋지고 성숙하다 믿었다. 솔직히 말하면, ‘왜 처음과 같이 사랑해주지 않느냐’고 따져 묻는 주변 친구들의 방식이 아이처럼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인정한다. 나는 상처가 두려운 어른아이였다. 상대가 나를 보러 오는 빈도가 줄어들수록, 상대가 친구들과 새벽까지 술 먹고 연락 없는 날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질수록, 의견이 달라 말다툼이 생겼을 때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대화 보다 한숨으로 대답하길 원할수록 나는 ‘역시 그렇지. 나는 독립적인 사람이고 이런 상대에게 집착하지 않아. 혼자가 더 편해’라고 생각하며 그 관계를 마음에서 정리해 갔다. 그리고 이별의 원인을 상대의 변한 태도에 두고 사랑의 피해자인 듯 오래 혼자 앓았다.


그러나 몸과 정신이 망가지는 이별을 겪고 난 후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상대의 태도가 티 나게 변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불안정한 모습들을 CCTV 영상 돌려보듯 머릿속에서 반복해서 보게 되었다.

통화 중에 상대의 한숨 소리를 들었을 때, 통화하며 내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해 같은 것을 반복해 물을 때,  겉으로는 쿨한 척 다음에 통화하자고 했지만 결국 나 또한 속상한 마음과 이유를 솔직하게 터놓지 않고 그 상황을 피해 전화를 끊고 혼자서 상대를 밀어내고자 했다. 원인이 상대에게 있었다고 해도 내가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 관계를 지키고 싶었다면 상대에게 속상하다 이야기하고 적어도 그 행동이 의도적이었는지는 알았어야 했다. 긴 연애에 편해져서 불쑥 나오는 언행들을 나는 그 순간 솔직하게 대화로 해결하지 못하고 그렇게 눈덩이 굴리듯 실망을 키워 결국 그 큰 눈덩이를 이별의 골문 앞에서 터지도록 했다.


삼십 대 와서야, 연애가 마음 같이 쉽지 않다고 느껴졌고 사람은 바뀌는데 결국 비슷한 패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반복되는 시작과 결말의 고리를 끊기 위해, 이번 연애는 변하기 위해 노력해보고 있다.

가끔 상대의 언행이 내 불안 방어기제를 작동시키려 할 때면 한 박자 쉬고 이성적으로 생각해 본다. 상대가 의도적으로 내게 상처를 준 게 아니라면 평소 상대의 배려와 정성스러운 마음을 생각하며 오해를 푼다. 그러나 며칠 동안 잊으려 해도 마음이 불편하다면 상대에게 담백하게 속상한 이유를 고백하고 상대에게 의도를 물어 오해를 풀려고 노력한다. 물론, 나의 오랜 불안 방어기제가 제어되지 않고 상처받기 전에 상대를 밀어내고 마음을 닫으려고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상대는 내 밀어내는 방어 기제를 눈치챈 듯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고 기다려준다. 내가 충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돌아오면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해준다.


오늘도 그런 상황이었다.

일주일에 하루는 꼭 보려고 노력해 온 상대는 며칠 전 비가 예보된 “토요일 점심에 보러 갈까?”라고 했고 나는 상대가 와주었으면 하는 마음 반 상대가 비 오는 날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반으로 고민하다가 “비 오니까 다음 주에 봐도 괜찮다”라고 애매하게 착한 대답을 했다. 상대는 그저 내가 합리적인 생각을 해주었다고 믿고 오늘인 토요일에 나를 보러 오지 않았고 저녁에 예정된 친구들과의 모임에 갔다. 2년 동안 봐온 상대는 비가 와도 내가 원한다고 했으면 별 투정 없이 와주었을 사람인데 내가 애매한 배려를 하고는 뒤에서 서운함의 눈덩이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렇게 마음을 깊게 들여다보고 깨달아도 서운함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고 방어기제 주변을 간지럽히기 마련이다. 상처에 난 피딱지 주변이 가려운 것 처럼 말이다. 그래도 무언가 불편한 관계 또는 방식이 반복된다면 꼭 그 복잡하게 얽힌 먼지들을 털어내고 어디에 가시가 박힌 것인지 끈질기게 알아내길 바란다. 그래야만 자신의 방어기제를 컨트롤할 수 있게 된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자신의 쿨함이, 그러나 왠지 마음이 불편한 태도가 사실은 상처가 두려운 방어기제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을 더욱 보듬어주고 온전한 사랑받고 싶어 해도 불안해해도 괜찮다고 말해주길 바라며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 끝에는 더 당당하게 표현하고, 마음껏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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