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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 Jul 12. 2023

엄마의 엄마와 아버지



'대문'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의 외할아버지는 이름처럼 나에게는 열고 싶은 궁금함을 간직한 존재였다. 정확한 한자를 몰라 이름의 의미를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대문이라는 말에 연상되는 큰 문의 뜻일 것이라고 나는 오래전부터 속단해 왔다. 내 어린 날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의 대상이었던 그는 사진으로도 한번 본 적 없고 아니 사진조차도 남겨져서는 안 될 만큼 외할머니와 엄마의 원망과 한의 근원이었기에 나에게는 항상 그저 닫힌 큰 문이었다.     


엄마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조강지처를 버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완고하고 독설스러운 엄마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여린 마마보이? 아니면 조강지처를 버리고서도 완전히 발길을 끊지는 못하고 그러면서도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못한 한량? 그도 아니면 지독한 시집살이에서 쫓겨난 불쌍한 조강지처를 잊지 못한 마음 약한 애처가?  어떤 것이든 아내와 딸 두 여자에게 상처를 주고 나름대로 그도 고달픈 삶이었으리라.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던 그의 이름처럼 큰 문이었을 그는, 그 시절 밥을 굶지는 않을 정도라면 부자라고 했던 때에 누나가 많은 집의 귀한 외아들이었다. 그리고 외아들에 대한 모성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특별했다.      


얼마나 며느리가 미우면 밥을 굶기는 시어머니였을까.

사랑에 이유가 없듯, 미움에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어린 며느리에게 박힌 무수한 미운털 중에 딸을 낳았다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가난한 집 첫딸. 없는 살림에 치워버리 듯 시집이라고 온 주제에 애교도 없이 뻣뻣한 모양새가 애당초 눈에 차지 않았는데 음식솜씨가 좋고 손끝이 야물다는 소문을 믿고 밭일이며 집안일에 도움이 될까 해서 며느리로 받아들였더니 아들이라도 낳았으면 그런대로 눈감아 주려고 했는데 저 닮은 계집애를 떡하니 낳고 나서는 더 꼴 보기가 싫어졌다. 맨몸으로 시집을 와서 아들도 못 낳아, 애살스럽지도 않고 말도 없는 무뚝뚝한 곰 같아, 어느 한구석 봐줄 만한 데라고는 점점 없어졌다. 자식 입에 먹을 것이 들어가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르지만 미운 며느리 입에 먹을 것이 들어가는 것만큼 아깝고 꼴 보기 싫은 것도 없었다.  

    

온종일 밭일에 집안일을 하고 나면 밥이라도 한번 제대로 양껏 먹어보지 못한 시집살이였다. 항상 며느리 몫의 쌀을 덜어내고 밥을 짓게 하는 시어머니. 매일 굶다시피 하는 불쌍한 며느리를 보다 못한 시아버지는 자신이 먹는 밥에 슬그머니 물을 부어 밀쳐내었다. 안 먹을 거면 놔두지 왜 물을 부어 다른 사람도 못 먹게 버리냐고 시어머니의 핀잔을 들으며 그제야 시아버지가 먹다 만 밥 한 술 먹을 수 있었던 물 반 눈물 반에 말은 밥이었다.  시아버지보다 서열 위였던 무시무시한 서슬 퍼런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는 참을 수 있어도  자신의 배고픔에 더해 주린 배에 눈칫밥까지 먹는 어린 딸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젊은 엄마의 엄마는 어린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엄마의 기억에 여동생이 있었다. 작고 사랑스러운 여자아이였다.

어린 엄마의 젊은 엄마는 혼자서 두 아이를 먹여 살리며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집에서 삵바느질을 하였다. 한 번도 배운 적도 없었지만 어떤 옷이든 똑같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손재주는 동네에서 소문이 좋아 일거리는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 혼자의 힘으로 살아내기도 벅차 아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지 못하는 삶이었다. 어느 날 저녁 배가 아프다는 작은 여자아이의 칭얼거림이 시작되었다. 젊은 엄마는 산더미 같은 바느질거리를 앞에 두고 아이의 아픔마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빨리 자라고 아픈 아이를 이불속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아이는 싸늘하게 죽어있었다. 동네 산에 아이를 묻었다. 어린 엄마의 기억에 그 후로도 젊은 엄마는 아이를 묻은 산에 몇 번이나 올라가서 울부짖듯 울었다고 한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일만 시키고 밥을 굶기는 잔혹한 시어머니의 구박에도 울지 않던 그녀가 우는 것을 어린 엄마는 처음으로 보았다. 그 눈물은 감정 따위 없어졌다고 믿었던 그녀가 죄 없이 죽은 딸 앞에서 자신도 같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자신에 대한 애도(哀悼)였다.

그렇게 엄마는 엄마의 엄마와 단 둘이 남겨졌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쫓아낸 속내를 드러내어 바로 새 며느리를 구했다.  외할아버지의 둘째 부인은 외할머니와 달리 사근사근하고 말이 많은 자그마한 여자였다. 사람들의 말로는 곡식이 좀 있는 집의 딸이라고 했다. 모든 일은 시어머니의 계획대로 될 것 같았는데 조강지처를 내치고 벌 받을 거라는 동네 사람들의 입방정이 들어맞았는지 억울한 사람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아들 귀한 집의 염원과 달리 첩은 내리 딸만 다섯을 낳고 말았다. 본처를 나 몰라라 해서 그렇다고 믿은 외할아버지 일가는 그 뒤로는 외할머니와 엄마에게 발길을 끊지는 않고 서로 왕래하였다고 했다. 명절이면 엄마에게 비단 한복을 지어주기도 하고, 한 번씩 아버지의 집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 뒤로는 신기하게도 아들도 얻었다고 했다. 엄마의 기억에는 아버지의 집에 가면 옹기종기 아이들이 싸우고 북적대는 집이 재미있게만 보였다고 했다. 언제나 젊은 엄마와 둘이 외로웠던 어린 엄마였다. 그리고 점점 아버지의 집에 가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의 집에 갈수록 점점 더 외로워진다는 것을 엄마는 알게 되었고 외로움은 시간이 지나 증오가 되었다. 엄마는 다시는 외할아버지를 찾지 않게 되었고 그 뒤로 발길은 끊어졌다. 외할머니는 혼자힘으로 그 시절에 엄마를 고등학교까지 졸업시키며 뒷바라지하였다.  그런 고생을 하면서도 외할머니는 끝까지 호적만은 파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둘째 부인은 영원히 첩으로 남게 되었다. 아마도 그것은 지금은 사라진 호주제에 근거한 것으로 호적에나마 엄마에게 아버지를 남겨두고 싶었던, 그래야만 딸이 흠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믿은 외할머니의 신념 같은 것이었다. 그것으로 외할머니는 그들에게 복수를 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두 모녀는 세상에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인 듯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젊은 여자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들만 낳았으면 아무리 표독한 시어머니라도 그래도 밥을 굶기며 일만 시키지 않았을 것이고 배고파 쫓기듯 그렇게 도망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간절함이 사람보다 커지면 운명이 되는 것일까. 할머니의 간절함은 엄마에게 유전되어 엄마 역시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셋을 연이어 낳았다. 아들이라고 굳게 믿었던 셋째마저 손녀가 돼 버린 내 동생을 받으면서 할머니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수돗가에 앉아서 흘리셨다.  그리고 아들에 대한 대를 이은 미련을 버리셨다.     



외할머니는 그 후로 우리 집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오래된 원래의 친정집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셨다. 나의 어린 날들의 저녁이 되면 엄마는 할머니를 위한 찬거리를 준비했고 우리 세 자매는 돌아가며 할머니 집으로 음식 배달을 다녔다. 그러면 할머니는 밭에서 키운 호박, 호박잎, 가지 같은 야채들을 우리 손에 쥐어주셨고 그날 우리 저녁 반찬이 되었다.  할머니의 집에는 전화가 없었기에  우리는 비둘기처럼 할머니 집을 오갔다.  할머니는 음식솜씨가 좋아서 명절에는 우리 집에서 한과를 함께 만들기도 했고 키우던 닭을 잡아서 한 여름에는 우리들 몸보신을 해주기도 하셨다.  나의 유년은 할머니와의 추억으로 더 풍성해졌다. 할머니 집은 우리 집을 거쳐 가야 해서 할머니는 언제나 지나는 길에 들르셨다며 휴게소 같은 우리 집에서 다리를 쉬었다 가시곤 했다.  엄마는 할머니의 남은 생을 그렇게 함께 했지만 할머니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 아쉬움이 팔순이 된 지금도 남아있다.  엄마가 지금의 내 나이였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엄마는 세상의 끈을 놓은 사람처럼 울다가 기절을 하고  몇 번을 까무러쳤다. 이제 그때의 할머니보다 나이가 많아진 엄마는 살아갈수록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어느덧 30년이 되어가지만 할머니와 엄마 사이의 그 끈끈한 마음 이상의 무엇을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사진출처 : 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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