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숙경 Aug 12. 2023

그녀의 나비

날아가버린 무엇

1


 시료를 얹어 놓고 클립으로 고정을 한다. 스무 개 남짓 모아진 것 같다. 대안렌즈로 눈을 가까이 들이댄다. 리볼버를 회전시켜 대물렌즈의 배율을 차츰 높여준다. 자칫하면 시료와 대물렌즈가 부딪칠 수 있으므로 눈금자로 잘 확인하면서 배율을 조정해야 한다. 현미경의 스코프에 눈을 대고 관찰할 수 있는 것은 무한하다. 무엇이건 재물대 위에 올려놓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형태나 빛깔과 전혀 다른 것을 보게 된다. 핀셋으로 시료를 빼내 샘플박스에 담는다. 이젠 더 이상 채집이 불가능해졌으므로 아주 소중히 보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침대나 책상 밑 욕실 구석구석을 뒤져 찾아봤지만 더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는 떠났다.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헤어지자고 하지 않았고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하지도 않았지만, 이것만큼 확실한 사건은 이제껏 없었다. 난 늘 나쁜 예감이 맞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회사에 있었다.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에 뚫린 조그만 창으로 빛이 들어왔는데 갑자기 전율이 온몸을 뚫고 지나갔다. 바지 위에 오줌을 지릴뻔하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런 현상을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암튼 누군가가 죽는구나 하는 나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죽는 것은 그다지 두려운 일이 아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은 늘 자각의 문제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죽는다면 죽음을 사는 일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리에 돌아오자 전화가 걸려왔고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다. 사는 일은 늘 죽는 일인 것이다. 그뿐 아니라 많은 일들이 내 예감에 들어맞았다. 그러니 그녀가 떠난 것은 앞뒤를 생각해서도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리움 같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내 가슴을 옥죈다. 사랑이라면 얼마나 다행일까. 그녀의 얼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로지 그녀의 나비만이, 그녀와 함께 날아가 버린 나비만이 회한의 대상일 뿐이다.          


  그녀의 몸에서는 한 마리의 나비가 자라고 있었다. 날개를 활짝 편 나비 한 마리. 숨을 고를 때마다 나비는 날아오를 듯 날아오를 듯 안타까운 날갯짓을 하는 것이었다. 좌우 양쪽의 치모가 겹치듯이 똑같았다. 나비의 날개처럼 가운데가 들어가고 음부 쪽으로 들어가서는 작은 날개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제멋대로 뭉쳐 있는 치모들은 많이 봤지만 이렇게 가지런하고 윤기가 흐르면서 나비 모양을 한 것은 보지 못했다. 한 올 한 올이 나비와 나비의 골격인 맥을 이루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거대한 나비가 될 것도 같았고 작은 나비들이 수만 마리나 모여 앉은 꼴인 것도 같아 보였다. 내가 그녀에게 빠져든 것은 그때였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구청의 지적과 주사였다. 명함을 갖고 다닐까 생각해 봤지만 그런 건 의미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받자마자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수도 있고 지하철 계단 밑에서 뭇사람들의 발길질을 당할 수도 있다. 만약 명함을 만든다면 이렇게 쓰고 싶다. 웃기지 마. 놀고 있네. 이런 말들이 적혀있는 명함을 받으면 사람들은 얼굴이 달아오르고 날 쏘아보겠지. 당장 찢어발기겠지만 난 오래 기억되는 사람이 될 순 있겠지. 미움을 받는 것만큼 사람들에게 기억의 되새김을 받을 수 있는 일이 뭐가 또 있나. 노벨상을 받는다, 우주를 유영한다, 백만장자가 된다, 그런 사람들도 누군가의 미움에 의해 향상된 때문이다. 지독하게 미워하는 누군가가 있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무리가 있어 그 반사의 힘이 그들을 정상으로 끌어올린다.  

  어렸을 때 선천성 소아마비를 앓고 난 후부터 난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보이지 않는 미움. 어머니의 낭패한 시선. 아버지의 외면과 잦은 외박. 형의 눈에 빤히 보이는 친절. 무엇보다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를 몹시 거북해하고 미워한다는 거였다. 땅으로 꺼질 듯 질질 끌리며 따라오는 다리를 왼쪽의 다리는 기다리지 못하고 화를 내면서 질타를 했다. 너 계속 그럴 거야? 그냥 안 둔다. 빌어먹을 놈의 다리 때문에 나까지 욕먹네. 그런 식으로 미워하자 난 외출을 삼갔다. 집에 틀어박혀서 있는 때가 많았다. 어머니는 안심이 되는 것 같아 보였고 아버지는 여전히 출장이다 뭐다 해서 집에 없는 날이 많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날 미워하는 사람이 한 사람 줄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어머닌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늘 밖으로 돌아다니는 일을 하다가 그리 되셨고 그게 다름 아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 생각을 돌려놓을 방도가 내겐 없었다. 어머니에게 난 어디까지나 죄인일 수밖에 없었다. 



2


  늘 책꽂이 구석에 꽂혀 있던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지도를 펼쳐 본다. 지도의 축소판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그녀가 날아가 버린 곳이 어디일까를 가늠해 본다. 이 한 장의 축소판에 그녀는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이 아쉬울 뿐이다. 종이의 재질이 얽혀 있는 모습을 볼 순 있겠지만 그녀가 있는 곳을 말해줄 순 없다. 잡지를 넘기자 화성 탐사선 스피릿과 오퍼튜니티가 보인다. 외로운 탐사를 계속하다가 스피릿이 결국 수명을 다하고 우주의 공간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우주에서 생물체의 존재를 찾아다니는 인간의 눈물겨운 노력이 보인다. 잡지를 넘기다가 가위로 종이의 귀퉁이를 자른다. 글자가 있는 종이를 재물대 위에 올려놓아 본다. 사랑의 ‘사’ 자다. 현미경이 물체의 상을 확대하는 원리는 대물렌즈에 의해 확대된 상을 접안렌즈로 다시 확대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거리에서 나온다. 빛과 현미경의 거리, 경통을 통과해서 내 눈에 비치는 상과의 거리, 나와 그녀의 거리. 거리의 간격을 잘 맞추지 못하면 즉 초점을 상실하면 모든 게 사라진다. 물체와 대물렌즈 사이의 거리가 조금만 변해도 제대로 된 상을 보기 어렵다. 약간의 비걱거림이 있어도 어긋나 버린다. 결국 나와 그녀의 관계도 이런 보이지 않는 비걱거림이 원인이었던 것이 아닐까? 서로를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엉뚱한 모습을 비춰 바라본 건 아닐까. 그래서 그녀와 난 다른 사람이었던 건 아닐까. '사' 자의 확대된 상은 배율을 달리함에 따라 또렷하고 선명하지만 글자가 아닌 물체로 환속된다. 이 속에서는 ‘사’ 자는 사라지고 종이 펄프의 억센 입자가 검은 잉크에 먹혀든 낯선 세계가 보인다. 더 확대하면 펄프의 공간 사이가 멀어지면서 우연처럼 던져진 별들이 보인다. 그 별들의 공간에 내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대안렌즈에 디지털카메라를 장착해 놓았었다. 삼안 현미경이다. 비친 상을 카메라로 찍어 컴퓨터에 저장해 두었다. 그녀의 나비는 이미 여러 컷 저장해 두었다. ‘사’ 자도 카메라의 렌즈를 열고 찍는다. 짤깍하는 순간 죽음이 열렸다 닫힌다. 나는 그녀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녀는 구청에 서류를 가지러 왔었다. 얼굴은 평범했고 특징이 없었다. 두 번째 왔을 때 그녀는 나에게 이상한 눈짓을 보냈다. 약간 찡긋하는 것도 같았고 미소를 띤 것도 같았다. 나에게 이런 눈길을 주는 여자는 없었다. 내 다리를 보는 순간 모두 달아나버렸다. 내가 일부러 일어나 걷는 모습을 보였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관심을 보였다. 여자가 달아날 수 있는 여러 통로를 주었음에도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퇴근 시간에 그녀는 내 차가 서 있는 곳으로 왔다. 저, 할 말이 있어요. 그녀가 내게 바짝 붙으며 말했다. 너무 거리가 좁았으므로 몸이 부딪히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여자는 예쁘지는 않았지만 고양이처럼 귀여운 구석은 있었다. 양 눈 가장자리가 약간 치켜 올라가 있고 입술도 얇은 데다 끝을 올리고 있었다. 다른 동료들의 시선을 받지 않기 위해 우선 그녀를 태우고 거리로 나왔다. 여자를 태우고 어딘가를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무실의 동료 여직원을 태우고 다른 구의 구청에 가서 자재를 빌려오는 일은 있었다. 퇴근을 도와주는 일도 어쩌다 있었다. 그때도 마음 한구석 뿌듯한 기분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여자와 함께 차를 타고 있는 기분이란 실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가 다리를 절고 있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이 뭐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라는 말도 함께 했다.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것의 반의반도 보지 못하고 사람들은 죽어버려요. 그러고 보니 그녀가 달리 보였다. 가볍게 펄펄 날린다는 느낌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머리 위에 무게가 나가는 물건을 얹은 것처럼 묵직한 맛이 느껴졌다. 값싼 이미테이션 목걸이도 빛이 나 보이고 굽이 달아 딸각 소리를 내던 구두도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같이 보였다. 그만큼 내가 나를 미워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미워한 나머지 누군가가 얄팍한 동정의 손을 내미는 것을 덥석 잡아버리는 뻔한 실수를 자행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속고 또 속는다는 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게 다름 아닌 함정이라 해도 좋았다. 무언가에 빠져들어 흔적도 없이 매몰되어 버리고 싶은 때가 있는 것이다. 

  그녀는 내가 혼자 살고 있는 집으로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왔다. 뭐가 들었어? 하면서 내가 가방을 보려 하자 그녀는 획 낚아챘다. 알아서 뭐 하게요. 그러더니 마치 소중한 무엇이 들었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여행용 가방의 거죽을 쓸었다. 그녀가 온 다음부터는 거리의 여자를 살 필요가 없었다. 날마다 즐거운 게임을 하듯이 새로웠고 신기하기만 했다. 그녀의 몸을 더듬고 있으면 휘발성이 강한 물체와 닿은 기분이었다.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서 꼭 붙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내가 현미경으로 미세한 조직들을 관찰하는 것을 보고는 쿡쿡 웃어댔다. 자 이거 좀 봐줘요. 하면서 내게 불쑥 내민 것은 그녀의 치모 한 가닥이었다. 금속판의 무늬를 보고 있던 나는 좀 놀랐다. 손톱 끝에 떨고 있는 건 꽃잎이나 나뭇잎 따위가 아니었다. 잠자리 날개나 파리의 주둥이를 관찰하던 때도 있었다. 일반 현미경으로도 이런 정도는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포착할 수 있다. 원자의 배열이나 구조를 알려던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내가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다. 단지 내가 찾는 것은 일반 물질들 속에 있을 또 다른 질서와 형태다. 여자가 건네준 시료를 받아서 재물대 위에 얹었다. 여자가 다가와서 책상 위에 엎드렸다. 대안렌즈 20배, 대물렌즈 10배, 총 200배 배율에 할로겐 백색광의 조명을 켜고 필터를 꽂았다. 특정 파장만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다. 치모는 균일하지 않다. 군데군데 상처처럼 홈이 파여 있다. 중간중간 대나무의 마디 같은 사선도 보인다. 더 확대하면 단백질의 섬유질이 겹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여자는 자기도 보겠다고 머리를 디밀었다. 흥, 별거 없네. 그러면서 다시 침대로 되돌아갔다.  

  집에 칩거하다시피 살아온 내게 유일한 취미가 있다면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사실은 고래처럼 자라 있는 미움의 덩이를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 뿌리가 내 안 어디까지 뻗쳐 있는지, 응축된 그것의 형태를 알아내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코딱지도 확대해 보았었다. 지금은 그런 짓을 하지 않지만. 별명이 코딱지인 친구가 있었다. 그는 늘 콧구멍을 쑤시고 다녔다. 학교 정문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을 보면서도 코를 후볐고 선생님의 호명에도 코를 쑤시며 일어섰다. 자연스럽게 별명이 코딱지가 되었는데 어느 날 집의 벽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고 말았다. 아이들이 코딱지가 죽었다고 했다. 코딱지는 사라졌고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확대한 코딱지는 사람을 전혀 닮지 않았다. 그런 게 사람의 몸에서 나온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사람과 연관이 부족해 보였다. 내 정액을 받아 확대해 보았다. 400 배율 정도로도 볼 수 있다. 난 내 정액이 어떤 병균에 노출돼 있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스러웠다. 내가 알지도 못하던 때 내 몸에 바이러스가 몰래 들어왔듯이 말이다. 내가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을 따져가며 행복과 불행이 와주지 않으니까. 그녀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3


  언제부턴가 그녀의 외출이 잦아졌다. 함께 산책하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했다. 나와 함께  산책을 하는 일은 그녀에겐 고역일 테지만 나에겐 더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처음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다가 점차로 짜증이 심해져 갔다. 혼자 가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얼굴에 홍조를 띠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돈 좀 줘요. 다리미가 고장이 났어요. 도대체 돈이 필요할 때마다 타서 쓰자니 미치겠네. 난 그녀가 돌아버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아예 신용카드를 맡겨 버렸다. 필요한 것들을 사라고 했다. 살림이 점차 늘었다. 다리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쓸데없는 물건들이 쌓여갔다. 내가 나무라면 그녀는 돈 주고 산 물건들을 내던졌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도무지 손쓸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내 신용카드로 대출까지 받아썼다. 결제일이 다가오면 카드로 돌려 막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녀를 놓아버릴 수 없었다. 

  폴더를 열어 이미지 파일을 본다. '사'자도 사랑이라는 파일명으로 저장했다. 이미지 캡처 보드와 전용 소프트웨어를 설치해 두었다. 그러면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컴퓨터에 저장해 놓고 확대해서 출력할 수도 있다. 벽에도 여러 가지 사진을 걸어놓았다. 개미의 주둥이, 얼음의 결정체, 금속판의 기하학적인 무늬 따위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공개한 이미지도 많이 있다. 내가 확대한 이미지를 현상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무늬나 형태를 볼 수도 있다. 아름다운 것을 찾는 것이 아니다. 여기 꽃잎이 있다고 치자. 붉고 야들야들한 꽃잎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기분이 좋아지고 사랑의 마음이 일게 된다. 그것을 확대해 보면 가늘고 수많은 실핏줄 같은 잎맥이 보인다. 더 확대해 보면 수많은 잎맥은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표상이 될 뿐이다. 이걸 아름다움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울었다. 여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떠나지 말라고 떠나지만 않으면 원하는 대로 다 주겠다고. 정말이야? 그녀는 악녀처럼 미소 지었다. 여자는 내 손을 잡고 처음으로 입을 맞췄다. 그녀의 손에 집을 저당 잡힌 돈을 쥐여 주었다. 그녀는 눈에 광채를 내며 좋아했다. 그러고는 의무를 다한다는 듯이 침대 위로 올라갔다. 나는 몰랑몰랑한 솜사탕이 쥐어진 아이처럼 조심스럽게 그녀를 더듬었다. 짓이겨버리고 싶었다. 곤충의 날개를 관찰하고 나머지 몸통을 휴지로 짓이겨버렸듯이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무심하고 건조했다. 오로지 그녀의 나비만이 흔들리며 반응했다. 한 마리 나비 위에 누워 있는 듯 짧은 한숨이 터져 나오면서 날아가는 듯했다. 날개를 너울거리면서 공간에 모아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가벼운 듯 힘겨운 날갯짓이다. 항해는 어느덧 끝나고 나비의 팔랑거림은 이내 어느 꽃잎의 수술에 닿고 살포시 날개는 접힌다. 어느 한순간도 거칠거나 난폭하지 않았다. 여자는 그제야 두 팔로 나를 감싸 안아준다. 어떤 자비가 이보다 더 안온할 수 있을까? 어떤 행복이 이보다 더 할 수 있을까?  한 마리 나비 위에서 노니는 기분이란..

  그녀는 또 나갔다. 한쪽 구석에 있던 가방을 열어보았다. 그녀를 알 수 있는 어떤 것도 들어 있질 않았다. 책이나 노트 같은 것도 없었고 전의 살던 주소지도 알아낼 수 없었다. 이름조차도 본명인지 알 수 없었다. 김혜선. 그녀가 누워 있던 침대 위에 떨어져 있던 나비를 하나 집어 들었다. 유일한 진실이 있다면 그건 실물이다.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면 믿을 수 없다. 내가 현미경으로 보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에 가까운 허상이다. 하지만 속임수도 아니다. 왜냐면 샘플을 만질 수는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욕실에 떨어져 있는 것도 하나 주워서 샘플박스에 담아두었다. 그녀가 나갈 때마다 하나씩 주워 담았다. 그녀의 나비를....... 

  출근을 하자 과장이 오라고 했다. 과장과는 벌써 오 년째 함께 근무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내 마음을 잘 이해해주고 있었고 배려도 잘해 주었다. 그는 좀 화가 난 듯했다. 자네 누구와 함께 지내나 본데 말이야. 소문이 벌써 났지. 아니 그럼 아무도 모를 줄 알았나? 조심하게. 자네가 너무 순진해서 말하는 거니까 오핸 말고. 과장의 말로는 무슨 룸살롱 같은 데서 본 사람이 있다는 거였다.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모든 여자는 창녀의 기질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나는 구청청사의 한 구석에 앉아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가을을 여는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여자의 뒤를 알아보았다. 심부름센터에서는 소소한 것까지 알아다 주었다. 만약 돈을 더 지불했으면 그녀의 어릴 적 친구들 명단도 알아올 판이었다. 그녀의 고향은 김포라고 했다. 그녀의 부모는 그 너른 땅의 한 조각도 소유하지 못했으며 아버지는 일찍 병으로 죽었다고 했다. 그다음은 불행이 여자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여자는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섬으로 팔려갔었는데 어떤 사람의 도움으로 나왔다는 말도 들었다. 


  다이아몬드 나이프로 금속을 자른다. 금속을 금속으로 자르는 일은 매우 까다롭다. 나이프의 날이 상하지 않도록 신경을 집중한다. 알루미늄 같은 무른 금속은 표면이 밀리지 않도록 코팅을 해준다. 전 처리 과정이 있어야 금속의 무늬를 볼 수 있다. 빛이 통과하는 거리를 좁혀주지 않으면 시료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얇게 썰어서 최소화한다. 전자현미경과 다이아몬드나이프는 가격이 만만치 않다. 금속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미지 파일을 만들기 위해 이것저것 도구들을 구입해 놓았다. 처음에는 동물 또는 식물들의 단면이나 암석 등의 구조를 보았는데 점점 금속 쪽으로 취미가 옮아갔다. 그림을 감상할 때 추상화를 보는 것처럼 보면 된다. 아무런 가식도 없이 떠오르는 이미지 그대로 그려놓은 그림들을 얇게 저민 금속의 박판 속에서 본다. 새로운 무늬를 보면 기분이 아주 좋아진다. 



4


  그녀와 함께 산책을 나갔을 때였다. 나는 산책을 할 때마다 포충망을 들고나간다. 잠자리나 나비, 그 밖의 다른 곤충들을 잡기 위해서다. 불편한 몸으로 나비를 잡겠다고 덤비는 나를 그녀는 못 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만히나 있지. 공원의 풀밭 속에서 무언가가 기어가거나 날아가는 것을 보던 나는 좀 의기소침해졌다. 그렇게 폴짝거리면 다들 쳐다보잖아. 애들도 아니고 벌레는 잡아서 뭐 할 거야? 그녀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며 말했다. 내가 하는 말은 잘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바람에 대해서, 숲의 정령에 대해서, 또는 나무에 붙어사는 벌레들에 대해서. 그런 것들엔 관심이 없는 듯했다. 할 수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진한 흙냄새와 풀 향기가 옷 속에 스며들었다. 아릿하게 콧속으로 스며드는 냄새를 맡으면서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뭇잎들 사이로 햇빛이 부서지면서 다양한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새로운 무늬를 바라보면서 앉아 있고 싶었다. 이러려고 나오자고 했어?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려면 왜 나오자고 했는데? 그녀는 갑자기 이어폰을 빼며 소리쳤다.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 어떻게 풀어주어야 좋을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메뚜기 한 마리가 풀 속에서 튀어나왔다. 메뚜기의 눈을 보고 싶어졌다. 살아 있는 채로는 불가능하다. 메뚜기를 작은 조각으로 분해해야 한다. 눈 부위를 도려내서 고정과 탈수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형태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다. 메뚜기의 눈은 작은 가시 같은 섬모들로 뒤덮여 있다. 그 섬모들이 외부의 병원균 따위를 막아줄 것이다. 파리의 눈을 확대하면 작은 공들이 여러 개 모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맛있는 음식을 바라볼 때처럼 즐거웠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공원의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들었다. 바지는 온통 흙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마비된 다리는 모처럼 많이 걸었던 탓에 묵지근하고 골반 뼈가 쑤셨다. 기진맥진해서 집으로 돌아오자 그녀는 저녁을 차리고 있었다. 옷은 왜 그래? 어디에서 넘어진 거야? 하여튼 맘에 안 들어. 밥을 먹는 내내 그녀는 나를 보고 웃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따뜻한 저녁을 함께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눈물이 한 줄기 흐르는 것을 몰래 닦았다. 감동에 젖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집에 들어와 준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내 걱정을 많이 해주고 있는 데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에 잘 때는 너무 피곤해서 그녀의 위에서 엎어져 버렸다. 

  그녀가 누군가와 만나고 있었다. 심부름센터의 남자는 내게 세세히 말해주었다. 누구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침을 튀기면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곳을 찾아가는 방법까지 손가락으로 그려가면서 말했다. 아, 이차선 도로예요. 아주 좁다니까요. 삼백 미터쯤 가서 우회전하세요. 아니, 아니 이정표가 있어요. 거기서 바로 보여요. 가보면 알아요. 그의 표정은 비장했다. 나보다 더 흥분해서 날뛰고 있었다. 같이 가 드릴까요. 아뇨, 됐어요. 그러자 그는 답답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혼자 가면 안 됩니다. 절대로. 하지만 나는 그곳을 가지 않았다. 가지 않고도 알 것 같았다. 그 남자의 얼굴에 다 있었다. 그렇게 표정 풍부하고 많은 걸 담고 있는 얼굴을 보지 못했다. 나도 덩달아 흥분이 돼서 내 문제가 아닌 것처럼 웃고 있었다. 갑자기 즐거우면서도 멜랑꼴리 한 생각이 전신을 감았다. 그녀가 오면 파티를 열자. 프랑스산 와인을 한 병 주문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치즈 무스 케이크를 준비하자. 늘 갖고 싶어 했던 칵테일 목걸이를 미리 호주머니에 넣어두어야지. 그녀가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듯이 불쑥 내미는 거야. 그녀는 감탄을 연발하겠지. 아니 너무 쉬운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이벤트라야만 하는데. 아, 그거야. 나비 모양의 와인, 나비 모양의 케이크, 나비 모양의 보석을 미리 준비하는 거야. 내가 사랑하는 그녀의 나비를 위해서. 

  직장을 그만두었다. 퇴직금으로 빚을 갚아야 했다. 그녀와 나는 낮은 저지대 아파트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그녀는 열심히 이삿짐을 날랐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그녀를 의심하다니. 저렇게 다정다감한 여자를. 사랑스러움이 뚝뚝 묻어나는 여자를 미워하다니.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 보였다. 이삿짐을 옮긴 후에 그녀와 나는 모처럼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날 밤 누워 있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 카메라를 갔다 대자 그녀는 조용히 다리를 벌려주었다. 몇 번을 부탁한 후에 그녀가 허락해 주었다. 그녀는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뭐가 좋은지 왜 좋은지 알 수 없었다. 때로는 마구 화를 내고 때로는 눈을 녹일 듯 따스했다. 카메라에 접사 기를 끼웠다. 이 센티미터 이내의 근접거리를 찍을 때 초점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렌즈를 바꾸고 다섯 컷의 사진을 찍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는 근질근질한지 깔깔대고 웃었다. 사진을 찍을 때 얼굴도 한 컷 찍어둘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다니는 여자였으니까. 사진을 찍어서 이미지 파일에 섞어놓았다. 확대하지 않고 가까이 카메라에 옮겨 찍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게 뭔지 모를 것이다. 그리고 밑에 ‘나비'라고 파일명을 정해주었다. 


  심부름센터의 남자를 거의 매일 불렀다. 그녀가 나가고 없는 동안은 초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아니, 이렇게 살 거면 왜 날 부름니까?  다리몽둥일 부러뜨리고 년 놈을 박살을 낼 게 아님 왜 자꾸 알려고 하는데요. 그는 내가 한심한지 그들을 향해 욕지거리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은 퇴근도 하지 않고 나와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잤다. 남자는 그녀의 행적을 알아보러 다니는 대신 내 옆에 붙어 있었다. 왜 안 나가냐고 물어보면 내가 불쌍하니 말벗이 돼주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말을 하면서 술만 마셔댔다. 이 일도 못 해먹을 짓입니다. 불륜을 캐다 바치는 직업이 어디 직업입니까? 집만 나가면 다른 짓들을 상상하니 이 세상 어디 믿을 게 있어야지요. 한날은 내 마누라까지 미행하지 않았겠어요? 얼마나 내가 의심이 많아졌는지 모를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여자 어느 모텔로 들어가지 뭐요. 그년을 얼마나 족쳤는지 몰라요. 남자는 술을 마시면서도 입을 계속 놀려댔다. 벽장 속이나 모서리 테이블에 카메라를 장착하고 그걸 보면요. 기가 막혀요, 기가. 뭐가 기가 막힌다는 건지 모를 일이다. 내가 그녀의 나비에 입을 맞추는 것보다 더 기가 막힌 일이 뭘까. 나는 아주 궁금해졌다. 



5


  그녀는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나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 잔만 마셔도 속이 메스꺼웠다. 술을 사러 밖으로 나왔다. 한낮의 태양이 아파트 화단에 내리쬐었다. 나무 그림자 아래 앉아서 햇빛이 차츰차츰 각도를 달리하면서 비추는 것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사람의 마음은 그토록 움직이지 않을까. 아무리 정성을 다해서 애정을 주어도 소용이 없는 걸까. 어떻게 하면 저 빛들 속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 거대한 우주가 태어나고 자라는 것을 함께 속삭여 볼 수 있을까. 아주 작아서 보이지 않는 것들 속에서 눈이 생기고 손가락이 슬금슬금 돋아나고 앙증맞은 입술이 비죽이 벼슬을 세우는 것을 말이다. 우주에서 날아온 운석의 무늬를 보고 싶어졌다. 화성 탐사선 오퍼튜니티는 어디쯤에서 모래바람을 맞고 있을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지구와 힘겹게 교신을 하면서 가쁜 숨을 쉬고 있겠지. 그들이 보내 준 영상들은 해독하기 힘들겠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위해 밤을 밝히고 있을 것이다. 그녀를 사랑했던 나의 마음은 어떤 무늬였을까? 미움도 빛깔이 있고 형태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 나는 그런 것을 알고 싶었을까? 여자와 함께 현미경을 보았던 때가 생각나서 눈물이 흘렀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흘끔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심부름센터의 남자에게 편지를 한 장 써서 그녀에게 전해주길 부탁했다. 남자는 편지를 받아 들고 자기가 먼저 읽어보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당신. 내게 돌아와 주오. 난 당신이 없는 세상에서. 이 부분에서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토록 유치하고 상투적인 낱말들을 늘어놓아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달리 무슨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제발 부탁이오.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해 봅시다. 말을 길게 이으려 해도 가슴만 답답할 뿐이었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녀는 나를 찾아왔다. 남자의 편지를 받아 들자마자 찾아온 것 같았다. 얼마나 알아냈어? 그 작자를 시켜서 그래 뭘 알아냈어. 당신은 나를 알 수 없어. 절대로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을 거야. 당신은 늘 나를 똑바로 보지 못해. 언제나 정면으로 날 보질 않아. 당신의 눈은 언제나 나를 비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아. 차라리 그것이 당신 자신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언젠가는 알 수도 있겠지." 여자는 내가 두려워서 말도 못 하고 떨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올 때처럼 가방 하나만 손에 들고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 후에 가버렸다. 가슴속에 슬픔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돌아올 거라는 믿음은 버리지 않았다. 언젠가는 내게 돌아올 여자였다. 

  아무 생각도 없이 날이 지났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일도 드물었다. 하루하루를 여자를 그리는 것으로 흘려보냈다. 남자로부터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벌을 받은 게지. 남자는 벌이란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그녀가 벌을 받을 만한 무엇을 했단 말인가? 난 그녀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었다. 죽을 만큼 잘못한 일이 대체 무어냔 말이다. 나는 가슴속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가 말리는데도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시신은 볼 수도 없이 꼭꼭 숨어 있었다. 병원 영안실에는 낯선 남자와 나이 든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내가 다가가자 이내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엔 경련이 일었다. 동생이라고 했다. 영정은 학창 시절의 사진인 듯 어려 보였다. 사진 속에서 가끔 웃어주던 미소 띤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비의 입을 확대하면 나선형으로 되어 있다. 다른 곤충들의 입은 톱니처럼 날카롭게 비죽이 솟아나 있는 반면 나비는 돌돌 말린 곡선의 형태를 띤다. 그녀의 미소는 부드럽게 입 가장자리가 말려 올라가 있다. 그런 미소를 어쩌다가 한 번 볼 수가 있었다. 이제 그런 미소를 가지고 가길 바랐다. 

  병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는 내가 나가자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던가요? 아무도 없겠습니까. 가족들은 있습디다. 그러자 남자는 걸음을 재촉하면서 말했다. 남자가 있지요? 그 여자와 놀아나던 놈일 겁니다. 그 여잔 내가 치근거려도 좋아하던데요. 밤에 술을 잔뜩 먹이고 흐느적거리는 걸 차도 쪽으로 확 밀어버렸어요. 하필 그때 차가 지나고 있지 뭡니까? 나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파리나 모기의 머리를 확대한 모습처럼 날카로운 톱니처럼 칼날이 곤두선 모습. 그렇지만 파리나 모기들도 생존에 필요한 이상의 무기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각기 알맞은 용도로 분화되고 발달되어 먹이를 구할 뿐이다. 난 내가 그동안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다.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사랑했어야 했다. 아무리 현미경을 들여다본들 내 안에 뿌리내린 미움이 더 작아지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남자를 보내고 돌아온 후 한동안 내 생활은 무질서했다. 


  금속의 화상 데이터는 컴퓨터에 내장된 플래시 메모리에 저장된다. 이미지 파일을 하나하나 넘겨본다. 이 파일들을 홈페이지에 올렸더니 사람들이 보고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나는 되도록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근접거리와 배율, 조명은 무엇을 썼고 렌즈는 좀 비싸더라도 어느 회사의 제품을 쓰는 게 좋다는 등이다. 만약 그들 중 그녀의 나비에 대해서 물어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아주 자세히 설명을 해줄 것이다. 그것은 아주 색다른 나비였어요. 촬영이 정말 쉽지 않았죠. 나비를 산 채로 찍었거든요. 배율은 천 배이고 날개 중심부의 아랫부분이지요. 그렇습니다. 몰라볼 수밖에요. 천 배나 된다니까요. 그렇게 고배율로 확대하면 모든 게 본래의 형태를 크게 벗어나버립니다. 사물은 제 모습을 잃게 되고 우리는 그 미로에 갇히게 되어버립니다. 그래도 좋습니까. 한 가지 더 말씀드리지요. 당신이 어디에서 희한한 무늬를 보게 되면요. 이 나비를 떠올리셔도 좋습니다. TV에서건 거리에서건 검은 얼룩이 난데없이 보이면 그게 바로 이 나비의 확대된 상일 겁니다. 내 여자의 나비란 말이죠. 자 설명이 충분하십니까.        


작가의 이전글 삼각조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