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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GAZINE JEBI May 23. 2024

IGOR의 미련만 남은 사랑

Tyler, the creator - [IGOR] (2019)

노래만 들어도 머릿속에 예전 추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경험을 한 번쯤 해본 적 있을 것이다. 평소엔 아무 생각도 없다가 노래만 들으면 그때의 장면이 정확하게 그려지는 신기한 경험이다. 필자에게도 그런 놀라운 경험을 하게 만드는 앨범이 여럿 있는데, 그 중 하나가 Tyler, the Creator의 <IGOR>이다. 앨범 첫 번째 곡 신스 사운드 소리만 들어도 2019년 초여름 대구에서의 짧은 자취 생활을 완벽히 소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땐 한창 전형적인 백수 패턴을 유지하고 있어서 자취방에 틀어박혀 게임하거나 영화를 보다 해가 뜨면 자는 게 일상이었는데, <IGOR>를 듣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따라 부르면서 뮤비 속 그의 우스꽝스러운 몸동작을 따라하는 건 덤이었다.


<IGOR>는 2019년 Tyler, the Creator의 정규 5집 앨범이자, 필자가 타일러를 알게 된 앨범이다. 예쁜 핑크색 배경에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얼굴 사진이 들어있는 앨범 커버와, 아티스트명에 ‘Creator’를 쓰는 그의 자신감이 궁금해 듣게 되었다. 처음엔 난해하고 정제되지 않은 사운드 때문에 놀랐지만, 신나지만 쓸쓸한 느낌이 당시의 새벽 분위기와 묘하게 어울렸다. 왠지 모를 이끌림에 반복해서 듣다 보니 어느새 이 앨범 하나만 반복 재생하는 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위기와 더불어 앨범이 담고 있는 설정 또한 독특하다. <IGOR>는 타일러가 만들어 낸 삼각 관계 내러티브를 다루는 앨범이다. 수록곡 속에는 앨범 이름과 동일한 IGOR라는 자아가 등장한다. 금색 단발 머리 가발을 쓰고 선글라스를 낀 IGOR는 여자친구가 있는 한 남자를 짝사랑한다. 사랑 관계가 끊임없이 변화하듯, 앨범 속 12개의 노래 속엔 간절한 짝사랑과 체념, 그리고 미련으로 이어지는 감정의 변화가 고스란히 들어있다.


짝사랑을 하며 느낀 지진과 같은 떨림을 고백하는가 하면, 상대의 관심을 위해 질질 끌려 다니는 자신을 자조하기도 한다. 동성애자인 상대가 다른 상대를 만나고 있는 괴로운 상황 속에서 사랑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마법을 부려 상대가 만나고 있는 여성을 지워버리고 삼각관계를 끝내고 싶어한다. 그러다 결국 이러한 관계가 자신에게 위험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끊어내려 한다. 감정의 찌꺼기를 정리하고 지옥 같은 짝사랑을 끝내며 스스로 일어서는 타일러. 하지만 끝내 미련을 못 버린 채 친구로라도 남고 싶은 마음을 털어놓는다.


타일러는 IGOR가 짝사랑을 하면서 겪는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다루기 위해 창의적인 방식들을 사용한다. 그래서 앨범에 수록된 곡들을 들으면 곡마다 분위기가 확실히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또한 Playboi Carti, Pharrell Williams, Kanye West 등 화려한 피처링진을 두었지만, 곡 옆에 피처링을 병기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어떤 곡은 피처링한 부분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뭉뚱그려 표현해 피처링이 잘 느껴지지 않게 표현하였다. IGOR라는 한 주체의 내면에 집중하려는 의도이지 않을까? 곡 사이사이에 스킷이 들어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타일러의 친구이자 코미디언인 Jerrod Carmichael의 목소리로, 스킷을 들으면 다음 곡들의 전개를 짐작해볼 수 있다.


처음엔 난해하고 정제되지 않은 사운드 때문에 갸우뚱했던 앨범이었다. 하지만 IGOR의 지독한 삼각관계 내러티브와 그걸 담아내는 타일러의 섬세한 표현방식을 알아가면서 타일러가 이름에 ‘Creator’을 사용할 자격이 있음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가진 그는 래퍼뿐만 아니라 의류 디자이너, 비주얼 아티스트, 코미디언, 뮤직비디오 감독 등 다양한 방면에서 Creator로서의 재능을 펼치고 있다.


타일러는 앨범 뒷 커버에서 짧은 글을 담으며 이 앨범을 들으면서 절대 스킵하거나 딴짓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볼륨을 최대한으로 키워서 소리랑 감정에 최대한 몰입하면서 들어달라고 한다. 편하게, 또는 신나게 즐기는 음악도 좋지만, 탐구하듯 자세히 파헤치는 노래들도 나름의 큰 재미가 있는 것 같다. 독자들도 함께 IGOR의 수록곡들을 들으면서 그런 재밌는 경험들을 해보길 바란다.


글 l 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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