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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GAZINE JEBI May 07. 2024

이터널 선샤인의 기억들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

반복되는 삶은 그 자체로 얼마나 허무한가.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변화가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삶은 고통이 끝없이 이어지는 비극인 걸까? 니체는 영원회귀 사상을 주장하면서도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을 것을 강조했다. 영원회귀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가야만 더욱 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끝없이 반복하는 삶을 긍정할 수 있을 때 우리 삶은 반복을 망각한 성스러운 것이 된다.


1984년에 발표된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다룬 대표적인 작품이다. 니체에 대한 쿤데라 자신만의 해석으로, 영원회귀(무거움) 속에서 몸부림치는 필멸자(가벼움)들의 사투를 풀어내며 삶에 대한 긍정과 초월의 메시지를 전한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우리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이 작품은 여전히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남아 있다. 


그리고 니체의 철학을 우리 삶 가까이 입힌 작품이 또 하나 있다. 사랑에 상처 받은 이들을 위로하는 미셸 공드리의 2004년작 <이터널 선샤인>이다. (이어지는 내용에는 <이터널 선샤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연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이 자신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엘(짐 캐리). 배신감에 고통스러워 하던 그는 자신도 그녀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자 라쿠나 사를 찾아간다. 하지만 기억 제거 시술이 시작되자 그는 온힘을 다해 기억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기억을 지우기 위해 그녀와의 기억들을 하나 하나 마주하는 과정에서 권태에 가려 제대로 보지 못했던 서로의 사랑을 똑똑히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쿠나 사의 기술자들은 그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기억을 모두 지워버린다.


다음 날 기억이 지워진 조엘은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이끌려 클레멘타인과의 추억이 담긴 몬탁행 열차에 오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클레멘타인을 만난다. 서로에 대한 기억이 지워졌지만 또 다시 서로에게 끌림을 느끼는 둘이 서로에게 빠지기 시작할 무렵, 때 마침 라쿠나 사 직원의 내부고발 우편을 받은 그들은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운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에 지치고, 사랑에 상처 받고, 사랑을 끝낸다. 지난 사랑에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후회와 실수의 기억들은 나의 밑바닥을 들춰낸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사랑한다. 지난 사랑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우편에 동봉된 테이프를 들으며 기억을 지우기 전 나누었던 서로에 대한 험담을 알게 된다. 반복된 다툼에 지친 그들의 전 연애는 기억을 지운 그들을 다시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리고 클레멘타인은 끝까지 듣지 못하고 방을 나선다. 하지만 조엘은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뒤따른다. 그는 우리가 만나면 또 다시 지치고, 실망하고, 후회할 거라는 클레멘타인에게 알겠다고(Okay) 답한다. 우리 사랑이 실수와 상처로 가득차더라도 괜찮다고 말이다. 우리가 다시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것처럼, 조엘과 클레멘타인도 다시 사랑하며 영화는 끝난다.


<이터널 선샤인>은 반복되는 상처에도 우리가 계속해서 사랑하는 이유를 니체의 철학으로 설명한다. 영화 중간 니체의 말을 인용한 대사가 등장한다.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기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니체는 기억에 집착하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망각을 통해 자유를 쟁취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우리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는 어린 아이가 되어 새로운 창조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엘 역시 기억을 지우는 과정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가 클레멘타인과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조엘은 그녀와의 지난 사랑에서 저지른 실수와 그로 인한 후회를 뒤로 한 채 그녀에 대한 사랑을 받아들였다.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이 모두 지워져서 첫 만남의 기억만 남았을 때, 그 기억까지 지워질까 두려워하던 조엘은 결국 망각을 선택한다. 행복했던 순간과 어리석었던 순간을 모두 지워버리면서 이 고통을 끝내버린다. 사랑했던 기억을 지우면서 그녀와 이별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기억이 지워진 서로가 다시 만나고, 또 지난 사랑의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조엘은 회피하지 않는다. 그는 고통스러운 회귀까지도 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난 망각의 과정에서 깨달은 긍정의 힘은 앞으로 다가올 괴로움을 마주할 동력이 되었다. 그런 조엘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클레멘타인도, 반복에 대한 두려움을 치유하고 다시 사랑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영원회귀를 망각한 긍정의 존재. 니체가 주장하는 이상은 우리 사랑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철학이다. 조엘의 사랑 이야기를 본 우리가 다시 사랑하는 이유는 우리 역시 망각의 힘을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새로운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길 바라며, 반복되는 사랑을 긍정할 용기를 주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었다. 


<이터널 선샤인>에 대한 감상을 마무리하며, 이동진 평론가의 영화평 일부를 붙인다. 사랑하기를 선택한 당신들을 위해.


“무차별적인 권태의 폭격에도 파괴되지 않고 결국 남는 것은 사랑했던 이유가 아니라 사랑했던 시간들이다. ‘이터널 선샤인’은 그 모든 기억마저 사라진 뒤에도 사랑했던 흔적과 습관은 남아 우리의 등을 다시금 떠민다고 말한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라면, 그곳이 진창이든 꽃밭이든, 그래, 좋다. 다시 또 한 번.”


이동진 <이유가 아니라 시간들> 


글 l 서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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