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 우리는 12세기 크메르 제국의 사원, 앙코르 와트로 여행 중이었다. 앙코르 와트는 ‘사원의 도읍’ 이라는 의미로 데바라자(神王)의 사후세계를 위해 지어진 사원이라고 한다. 거대 하게 산처럼 생긴 탑들과 긴 회랑들을 누비며 그 신비스러움과 원시미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부조의형태로 정교하게 장식된 힌두 신화의 이야기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화양연화의 촬영장소인 바로 그 기둥이 어디였을까 궁금했다. 홍콩영화 ’화양연화’는 첸부인과 차오의 슬프고 짧은 미완의 러브스토리다. 동병상련으로 서로를 의지하던 두 사람은 추억을 공유하게 된다. 이 시간들로 차오와 첸은 인생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꼈으나 모든 것을 비밀로 감춘 채 결말을 맺는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남주인공 차오는 앙코 르 와트 유적지의 돌 틈에 입을 대고 자신의 비밀을 채워 넣는다. 영화의 이 마지막 장면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서 나에게 오랜기간 여운을 남겼다.
‘화양연화花樣年華’ 글자의 의미로 파악한다면 ‘꽃 모양이 화려한 때’ 이다. ‘행복해서 꽃처럼 빛나 는 때’ .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 삶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시절,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의 화양연화는 언제였던가 생각해 본다. 20 대는 풋풋한 첫사랑으로 화양연화의 꽃봉오리를 터트렸다. 풋사랑이 그렇듯이 너무 덜 익어서 화려하게 빛나지는 못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가장 후회되는 시간이다. 그러나 뜨겁게 사랑해서 행복한 대상이 꼭 사람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랑의 본질적 의미가 ‘어떤 대상을 집착하여 귀중히 여기는 욕망’ 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첫사랑이 첫 번째 화양연화라면 30 대에는 그 대상이 학문이었다. 새로운 책을 보며 설레었고 지식에 굶주려 밤을 하얗게 새우곤 했다.
사랑이란 감정은 새로움에서 부터 피어나는 것 같다. 내 가슴에는 항상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레임과 그리움이 있다. 그러니 언제든 꽃은 필 수 있다. 누구는 사는 매일이 화양연화라 하지 않았는가. 이제 청춘의 화양연화와 같은 화려하고 빛나는 아름다움보다는 구비구비 넘어 쌓인 내면으로, 향기나는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 그리하여 나도 차오와 같이 돌 틈에 채워 영원히 봉인할 아름다운 비밀 하나는 간직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가 사원을 걸어 다니는 사이, 잠시 돌무더기 사이에 앉아 쉬자니 바람 한줄기가 이마를 스친다. 태고에도 불었을 바람이다. 바람을 따라 차우가 속삭인 그 비밀이 들리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