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여름, 왕가위 감독의 1997년 작 ‘해피투게더’라는 영화를 만났다. 이 영화는 남미를 배경으로 주인공들의 삶에 대한 열정, 그리고 사랑과 이별이 어우러진 인간군상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그들은 상처로 가득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희망을 찾아내는 사람들이었다. 삶 속에서 느껴지는 열정과 아픔들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아르헨티나와 남미 대륙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다. 그들의다채로운 문화와 아름다운 자연 풍경은 나의 여행 버킷리스트에 등장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나도 그들과 같은 곳을 밟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일었다.
이제 남미대륙 한 달간의 긴 여정도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거쳐서 남미의 땅끝마을 우수아이아로 가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 차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우수아이아는 온통 설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항구도시였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도시 방향으로 달리자, 저 멀리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났다. 파타고니아산맥 끝자락에 스위스의 동화마을 같은 예쁜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닷가에 비추어 반영된 작은 도시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이곳이 더 유명해진 것은 세상의 끝 빨강 등대 때문이기도 하다. 이 빨강 등대는 1920년에 세워진 에끌라이레우르스(Eclaireurs)등대다. 등대의 불빛은 비글해협을 지나 남극으로 가는 배에 밤길을 지켜주고 항로를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에서는 이 빨강 등대가 상징적인 의미로 나오고 있다. 주인공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방향을 잃고 헤맬 때, 그들에게 갈 길을 제시해 주는 상징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3의 주인공인 ‘장첸’은 연인인 ‘아휘’의 슬픔을 묻어주려 우수아이아의 빨강 등대로 간다. 그 이유는 그곳이 슬픈 기억을 다 벗어버리고 올 수 있다는 전설의 등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수아이아에 도착한 날은 성탄절 이브였다. 골목마다 젊은이들이 'Feliz Navidad'를 부르며 몰려다니는 화려한 모습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다음날이 비글해협 투어 일정이라 룸메이트 언니와 도시 구경을 나섰다.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포도주로 성탄절을 맞이하기로 했다. 약간의 알코올 때문인지 감정이 올라와 눈가가 촉촉해진 언니가 혼잣말하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우수아이아의 상점, 펭귄이 상징이다.
“나, 거기 가서 빨강 등대 보면 눈물 날 것 같아. “
“응? 왜, 언니”
“글쎄, 내 마음 나도 모르겠네. 왜 그런지…”
다음날 기대했던 세상의 끝 등대와의 만남은 불발되었다. 비글 해협 투어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취소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일행 모두 실망에 가득한 탄식을 내뱉었다. 이번 여행의 위시리스트이기도 했는데…
여행이 끝날 무렵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언니 우수아이아에서 느꼈던 그 슬픔은 무엇이었을까?”
여행 내내 말수가 적었던 언니는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녀는 6년 전,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혼자된 후 남편이 하던 회사를 정리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슬픔을 느낄 여유도 없이 세월이 흘러갔고 아직도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마음이 아팠고, 함께 한 여행에서 그녀가 느끼고 있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의 끝에서 등대를 바라보며 그녀는 아마도 남편을 그리워하고, 헤어진 이후로 오랜 시간 동안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털어놓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 언니, 이제 저 세상의 끝, 빨강등대에서 아름다운 기억은 남기고 마음의 슬픔을 묻어버려요.”
나는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위로해 주었다. 누군가 말했듯이 그리움은 삶의 한 부분이며, 죽음이 끝은 아니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기억 속에서 살아있을 것이다. 우리가 여행 중에도 자기 내면을 발견하고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을 찾은 것처럼. 그녀의 이야기는 우수아이아에서의 우리 여정을 더욱 의미있게 만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