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일본애서 신라의 민정문서인 신라촌락문서(新羅村落文書)가 발견된다. 이 문서를 통해 통일신라 시대엔 어떤 생활양식으로 백성들이 삶을 영위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촌락 이름, 촌의 영역, 호구의 등급, 인구, 가축(소와 말), 토지, 수목(樹木), 호구와 가축 감소 등의 순서로 공동체의 실상을 알려주는 내용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었으며 해당 기록은 3년 주기로 작성 및 갱신되었다.
마을의 영역은 주거지와 경작지만을 계산하지 않고 촌락 주변 산과 강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인구는 전체 인구수를 비롯해 3년간의 출생·사망·이동 인구 그리고 노비 수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오디, 잣, 호두와 같은 열매는 귀중한 식량으로 여겨져 수취의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유실수의 수가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뽕나무는 귀중한 자원이었다. 예로부터 누에치고 비단을 생산하는 양잠업(養蚕業)은 우리나라 근본 산업 중 하나였다.
조선시대에는 누에를 키우고 관리하는 장소인 '잠실(蠶室)'을 설치해 운영했다. 비단의 수요가 증가하자 뽕나무 대단지를 구성해 누에를 관리하는 장소를 확장했다. 지명에서 예측할 수 있다시피 오늘날 롯데타워와 각종 높은 빌딩 숲이 이뤄진 잠실은 원래 뽕나무 밭이었다.
이외에도 경복궁과 창덕궁 내에도 많은 뽕나무를 식재해 관리했으며 밤섬, 삼전도, 추자도 등 한강을 따라 뽕밭을 조성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뽕나무 식재를 권장하고 관리한 기록을 통해 명주(明紬)를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인 뽕나무 수를 유지하는 임무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예측할 수 있다.
낙엽 지는 큰 나무로 높이 3~10m가량 자란다. 당년지(1년생)는 녹색을 띠며 잔털이 있으나 사라지며 타원형의 피목을 관찰할 수 있다. 잎은 어긋나며 끝은 뾰족한 모양이다. 산뽕나무와 달리 잎끝이 길어지지 않아 육안으로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오디라 불리는 열매는 6~7월에 흑자색으로 익는다.
추신.
나는 아보리스트(Arborist)다.
나는 트리 클라이머(Tree climber)다.
나는 트리 워커(Tree worker)다.
나는 아무리 높은 나무일지라도 올라갈 수 있다. 뽕나무 수관이 넓어야 얼마나 넓겠는가. 등목 시스템을 구성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자유롭게 나무 위를 돌아다닐 수 있다. 어디서 어떻게 등목 기술을 이용할 수 있냐고?
그렇다. 나는 이 고급 기술을 이용해 1년에 한 번 오디를 딴다...
뽕나무 열매인 오디를 채취하는 방법은 주로 지상에서 긴 막대를 이용해 나무를 흔들어 열매를 떨어뜨린다. 이 방법은 간단하지만 수확하는 오디에 상처가 생길 수 있어 생산 효율이 좋지 않다.
그래서 나무 가슴높이에 그물망을 수관폭만큼 설치하고 나무에 올라 춤을 춘다. 리듬에 맞춰 윌리의 초콜릿 공장에 나오는 움파룸파 움파룸파 몸을 흔들면 이쁜 오디를 수확할 수 있다.
소개글 사진
https://www.rda.go.kr/webzine/2020/12/sub3-3.html
자료출처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100485&code=kc_age_10
https://www.rda.go.kr/webzine/2020/12/sub3-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