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빠진 회장선거
근사하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보자기를 덮은 제법 큰 바구니를 불쑥 가슴에 안겨주었다. 보자기를 살짝 들어보니 눈도 못 뜬 아기 라이거 두 마리가 머리를 맞대고 잠들어 있었다. 반짝이는 은빛 털에 진한 줄무늬가 새끼지만 힘 있어 보였다. "하지만 저는 동물을 싫어해요. 아니 무서워요" 할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잘 키워 봐요" 하더니 사라졌다.
큰 딸의 태몽이다. 곧이어 둘째가 생겼고 둘은 17개월 차이다. 연년생이지만 큰 아이가 12월생이라 두 학년 차이가 난다. 연달아 아이를 낳고 기르다 보니, 어느 날 취학통지서가 왔다. 아무 준비도 없이 덜컥 학부모가 되었다. 큰 아이 1학년때는 먼저 키워본 선배맘들을 따라 했다. 둘째가 입학을 했을 땐 내가 그 ‘선배맘’이 되어 있었다.
고맙게도 두 딸은 반듯하고 똘똘해서 또래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외향적인 첫째는 반장이나 회장에 관심이 점차 사라졌는데, 내향적이고 조용한 둘째는 해마다 반장을 하고 6학년에는 전교 회장까지 하겠다는 거다. 4학년 때부터 친구들과 다른 엄마들이 “수지야, 나중에 회장 해라~” “수지 말고 회장 할 인물이 없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는데 그게 현실이 되었다.
두 딸이 다닌 초등학교는 6학년에서 다득표 순서로 학생회장 1명, 부회장 2명을 뽑는다. 몇 년 전부터 엄마들이 학교 일 할 자신이 없다며 아이들을 회장 후보에 못 나가게 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급기야 그해는 회장 입후보 기간이 끝나가는데 등록하는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마감하루 전날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딸아이도 하고 싶다고 했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다른 친구 2명(남 1 여 1)이 더 지원을 해서 총 3명의 후보가 마감 날 등록을 했다.
등록한 친구의 이름을 들어 보니 여자애는 좀 의외였다. 후보등록을 하려면 부모님의 동의서가 필요한데 '지혜 엄마가 해줬을까' 의문이 들었다. 엄마가 간호사라 저학년 때도 학교에 거의 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날 담임선생님께서 “회장에 도전하고 싶은 친구는 내일까지 꼭 지원하도록 해요. 요즘은 부모님이 학교에서 할 일이 없어요. 절대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려요.”라고 하셨다. 지혜는 아빠에게 “후보가 없으면 내가 바로 회장이 될 수 있어. 그리고 담임선생님께서 엄마, 아빠는 학교 안 와도 된데”라고 말하고 엄마 모르게 사인을 받은 것이다.
사춘기가 되면 남자아이들은 남자 후보를 뽑고, 여자 아이들은 여자 후보를 뽑는 게 의리라 생각한다. 이런 상황이면 남자애 1명이 회장이 될 게 뻔하다 싶었는지 도영이 엄마는 부담스럽다며 사퇴를 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지혜엄마도 학교로 전화를 했다. 아침에는 3명이던 후보가 하교 무렵 1명이 되었다.
저녁에 담임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어머니, 혹시 지혜 어머니와 통화하셨어요?”
“아니요”
“아. 네. 지혜 어머니께서 ‘애 회장일 엄마가 도와줄 자신 없으면 알아서 사퇴하라’는 전화를 받았다나 봐요. 그 말에 교장선생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어요. 그리고 회장선거는 2월로 연기하셨어요. 혹시 어머니께서 전화하신 거면 수지를 후보에서 빼라 하셔서 저도 난처했는데, 수지 어머니는 관련 없으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오지랖 넓은 몇몇 엄마들이 후보 엄마들에게 전화를 했나 보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기분이 묘했다.
그 와중에 눈곱만큼이라도 연루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통신문이 왔다.
첫째. 회장선거를 2월로 미루겠습니다.
둘째.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면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을 엄마들의 욕심으로 막지 마세요.
셋째. 회장과 부화장 후보를 따로 받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학생회와 학부모회를 철저히 구분할 것이고, 학부모회 임원도 투표로 뽑겠습니다.
2월 다시 학생회장 입후보등록 기간이 되었다. 확실히 12월 보다 후보지원이 많았다.
그러나 회장 후보는 1명. 부회장 후보는 4명이었다.
회장에 지원한 작은 딸은 찬반투표로 대신하게 되었다. 회장 선거 유세도 없었다.
부회장 후보들이 친구들과 학교를 돌아다니며
"기호 1번. 열심히 하겠습니다." "항상 먼저 행동하는 부회장이 되겠습니다." 한 목소리로 외치는 모습이 부러웠단다.
작은 딸은 공약을 적은 피켓을 들고 혼자 서 있었다. 단독 후보라 '저를 뽑아 주세요' 하기도 애매했다.
찬반투표가 남았으니 '고맙습니다' 인사할 수도 없었다. 단지 "열심히 하겠습니다"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투표결과 12월에 지원했던 도윤이와 새로운 여자 친구가 부회장에 당선됐다.
김 빠진 무투표 당선 회장. 작은 딸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친구들은 당선된 부회장을 축하하거나 떨어진 친구들을 위로하느라 바빴다.
수지는 하루종일 혼자였다. 친구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나도 제대로 선거 유세도 하고 다득표로 축하받으며 회장 되고 싶었는데....”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작은 딸을 꼭 안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