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을 사랑이라는 수수께끼의 실체를 가장 그럴듯하게 표현한 사람은 장 콕토가 아니었을까. 그는 사랑을 불안과 고뇌라고 표현하였다. 사랑이란 자고로 사랑받지 않고서는 행할 수 없고, 사랑받는다 하여도 영원할 수 없는, 종국에 헌 것이 되고 마는 잠재적 고통이다. 사랑은, 요동치는 설렘에 자기 통제력을 잃는 단 한 번의 피크를 통과하는 순간 줄곧 내리막이다. 이때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내리막의 경사를 최대한 완만하게 유지하는 것뿐이다. 가장 진실한 순간은 가장 처연한 슬픔의 시작점이다.
그러나 사랑에 숨겨진 또 하나의 비밀은 사랑의 내리막이 또 다른 사랑의 오르막으로 쉽게 바뀌곤 한다는 사실이다. 사랑은 내리막과 오르막이라는, (어쩌면 영원한) 순환 구조를 띤다. <우리도 사랑일까>에는 이러한 순환 구조, 즉 헌 것이 새 것을 염원하고, 새 것은 곧 헌 것이 되는 사랑의 숙명론적인 양태가 사실적으로 담겨 있다. 사라 폴리 감독은 남녀가 한 쌍이 되어 원을 그리며 추는 춤인 왈츠를 영화의 제목('Take This Waltz‘)으로 선정하고, 마고와 대니얼의 결혼 생활을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카메라 워크로 담고, 둥글게 회전하는 놀이기구를 의미심장한 상징물로 활용한다. 이때, 대니얼과 함께 놀이기구를 탔던 마고가 결말에 이르러 홀로 놀이기구에 탑승해 원을 그리며 회전하는 장면은 새 것과 헌 것의 역학을 보다 명징하게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영화에는 순환의 궤적을 표방하는 원의 운동성만큼 직선의 운동성 또한 가득하다. 이 직선의 궤적은 어떻게든 삶을 지탱하고 살아내는 것으로 의미화된 다리의 운동성으로 가시화된다. 마고가 출장을 갈 때, 대니얼을 은밀히 유혹하기 위해 거리를 나설 때, 그리고 루와 재회한 뒤 다시 그곳을 떠날 때, 카메라는 유독 앞으로 움직이는 그녀의 다리를 포착한다. 사랑의 설렘과 권태에 구애받지 않고, 이 다리는 어쨌건 전진한다.
이 다리의 운동성은 마고가 비행기를 타는 장면에서 인위적으로 멈춘다. 공항에서 마고는 다리를 다친 척 휠체어를 타 의도적으로 직원의 도움을 받는다. 비행기 환승에 실패하여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붕 떠 있는 상태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삶의 동력이 멈춘 상황에서 그녀의 삶에 다시 엔진을 달아주는 것은 대니얼로 대변되는 새로운 사랑이다. 마고가 대니얼에게 호감을 느끼는 비행기 내부 장면 다음에 그녀가 그와 함께 공항 게이트를 걷는 장면이 이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비행기 장면을 제외하고) 영화 내내 마고의 다리가 앞으로 움직였던 것처럼, 삶은 사랑이 한 번 시작되면 결코 그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설령 권태로 변모한다 해도 말이다.
이때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람을 피운다고기존의 사랑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새 것을 찾아도 헌 것으로 회귀하는 이유는 반짝반짝 빛나는 새 것의 설렘만큼 헌 것이 안겨다 주는 평안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마고가 대니얼과 루 사이에서 끝없이 고민했던 건 두 사람 모두를 사랑해서다. 사랑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는 한 여전히 불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