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텀 스레드>에서 탁월한 연기를 선보였던 레슬리 맨빌 주연의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는 올해 이상할 정도로 언급이 되지 않은 비운의 작품이다. 이 작품이 걸작 혹은 빼어난 수작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관련된 글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평가조차 되지 않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물론 무관심에 방치된 이유는 꽤 쉽게 짐작 가능하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중년 여성의 판타지를 강조하면서 서사의 우연성과 인물들의 지나친 선의를 영화의 기본 전제로 공표한다. 서사를 추동하는 첫 번째 장면, 상류층의 청소부로 일하는 에이다가 집주인이 산 디오르 드레스를 보고 한눈에 반하는 대목에서 영화는 그녀의 감정을 줌 인 트랙 아웃과 슬로우 모션으로 한껏 과장한다. 자신보다 타인의 안위에 더 신경 쓰는 주인공 에이다의 성격 역시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그녀에게 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선의 또한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처럼 비친다. 영화는 이러한 전제들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지한 채, 오히려 그것들을 이 영화만의 고유한 특성, 그리고 창조적 제약으로 끌어안는다. 만일 이에 찬동하지 못한다면 사실상 영화는 거기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영화는 해당 장르의 다른 영화들이 그러하듯 상류층의 위선과 허영을 꼬집고 노동자들의 노고를 응원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다만, 선과 악의 양분에 있어 나름대로 균형추를 맞추려 노력하는 여타 영화들과 달리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는 선으로 대변되는 인물들, 그리고 그들이 내뿜는 서사 내의 영향력이 압도적이라는 점에서 구분된다.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선과 악의 비율은 각기 달라지겠지만, 선의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 욕망이다.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는 그 판타지를 이뤄주는, 살짝은 낯간지럽지만 무엇보다 포근하고 사랑스러운 영화다.
나의 경우, 나이를 먹을수록 타인에 대한 불신이 점차 증폭되는 편인데, 이는 반대로 말하면 타인에 대한 선의를 열렬히 원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며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건 결국 인간의 선의를 믿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는 오즈 야스지로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들을 보면서 떠올린 생각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런 류의 영화를 볼 때면 막연하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선한 욕망으로 충만해진다.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는 적어도 그러한 미덕이 있는 좋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