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초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자극, 이를테면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그리고 가볍고 휘발적인 자극이 환영받는 시대가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물론 이러한 자극이 지금 시대에 느닷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지만, 이토록 열렬한 환호와 주목을 받는 건 이례적이다. 작금의 사태를 보면 문화 콘텐츠라는 범주에 묶여 생산되고 가공되는 것들의 대부분이 인간의 사유 가능성을 없애고, 지능을 퇴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과장이 아닌 이유는 문화 콘텐츠란 시대의 얼굴과 정신 상태를 고스란히 반영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지금 시대에 도덕을 말하는 건 너무 진지하고 따분해서 어쩐지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인간 사회가 붕괴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두 가지 힘은 법과 도덕에 있다. 법이라는 테두리가 인간 사회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라면 도덕은 삶을 삶답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최소한의 정신 작용이라 할 수 있다. 이 기틀이 무너지는 순간 인간의 이기심은 폭발하고 곧이어 난폭해진다. 사람들이 어떤 주제와 논쟁에 대해 사유할 기회를 잃고, 그러한 여유를 강탈당하는 지금 시대에 유독 기이한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인간관계에 피로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도덕에 대한 고찰이 부족한 데다 그에 기반한 행동력이 현저히 감소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소 설교적인 면이 있더라도 마이클 커티즈의 도덕주의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더럽혀진 얼굴의 천사들>에서 드러나는 그의 단호하고도 뚝심 있는 도덕관은 지금 시대의 혼란에 대항할 어떤 기준점을 보여준다.
마이클 커티즈의 도덕주의가 인상적인 것은 그것을 에둘러서 표현하거나 교묘히 숨기려는 계략이 없기 때문이다. 순수한 정직성으로 또렷하게 설교하는 그의 태도는 강직한 자세로 학생을 훈계하는 모범 교사를 떠올리게 할 정도다. <더럽혀진 얼굴의 천사들>에서 뉴욕 불량아들의 워너비로 자리 잡은 갱스터 록키는 그의 친구인 신부 제리의 부탁을 받고 사형당하기 직전,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애걸하는 ‘겁쟁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강렬한 마지막 장면은 시대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록키의 위상을 나락으로 빠트려 젊은 청년들에게 갱스터란 고결함과는 거리가 먼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희생적인 결정을 한 록키에 대해 마이클 커티즈가 연민이나 측은함 같은 감성적인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록키가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장면은 온전히 벽에 비친 그림자와 외화면 사운드만으로 처리되어 관객이 도저히 록키의 심리에 다가갈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
그러니까 마이클 커티즈에게 악을 행한 인물은 죽을 때조차 연민이나 측은함을 받을 수 없는, 그저 빠르게 처단되어야 마땅한 쓸모없는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는다. 얼핏 보기에 지나치게 엄격하고 단호해 보이지만, 솔직히 어떤 면에서는 타란티노의 영화를 보는 것 이상의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조금은 위험할지 모르지만, 참을 수 없는 가벼움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지금 마이클 커티즈의 엄격한 도덕주의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의 도덕관은 적어도 무책임하지 않고, 쓸데없이 이상적이지 않으며, 느닷없이 감성적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