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멜로 영화는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는 사랑놀이 자체가 유치하다 생각했다. 영화에 빠진 지 몇 해가 지났을 무렵 나는 갱스터 필름과 필름 누아르, 그리고 프렌치 누아르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비판이 있었고, 무엇보다 비장미와 멋이 있었다. 또한, 카메라 워크와 암부를 통한 내밀한 심리 묘사, 그리고 비애로 얼룩진 인물에 대한 세련된 표현이 있었다.
한편, 유럽 영화를 필두로 한 소위 예술 영화라 불리는 일군의 영화들에 빠지기도 했다. 국적이나 성별, 시대 등은 전혀 상관없었다. 그냥 닥치는 대로 보았다. 생각나는 대로 적자면 데이빗 린치, 레오스 까락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다르덴 형제, 에드워드 양, 라스 폰 트리에, 페드로 코스타와 같은 비교적 최근 감독들부터 장 피에르 멜빌, 장 르누아르, 자크 베케르, 줄스 다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루기노 비스콘티, 오즈 야스지로, 알랭 레네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위대한 감독들의 영화를 찾아보았다. 이 감독들은 그저 관객 동원을 위해 편하게 양산되는 영화들과는 궤가 완전히 달랐다. 이른바 미학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고, 영화란 결국 카메라로 찍는 것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피부로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이른바 시네필이 되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때로는 우쭐대고 싶었고, 실제로 그러기도 했다. 그러나 간혹 영화를 봐야만 한다는 의무감, 더 정확히 말하면 영화를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뒤처지고 말 것이라는 강박과 집착에 사로잡혀 영화에 싫증을 느낄 때도 더러 있었다. 위에 기술한 영화들은 소위 상업 영화로 불리는, 상대적으로 감상하기 편한 영화를 볼 때보다 더 많은 체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의욕이 떨어진다는 건 치명적인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시기에는 영화 보기를 완전히 중단하기도 했다.
그때 문득 그동안 봐왔던 영화 리스트를 훑어봤다. 그러자 일련의 영화들이 하나의 점으로 모이면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동시에 그 문제가 해결되고 있음을 느꼈다. 하나의 점으로 모인 일련의 영화들의 공통점은 바로 멜로 영화라는 점이었다. 돌이켜 봤을 때, 삶의 의욕이 떨어지고 영화에 대한 무력감으로 허우적대던 시기에 나를 나아가게 했던 건 다름 아닌 멜로 영화였다.
물론 그렇다고 갱스터 필름, 필름 누아르, 프렌치 느와르를 비롯하여 평소 즐겨 보았던 고전 영화와 예술 영화들이 재미가 없었다거나, 그것들을 젠체하기 위한 도구로 삼았던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절망의 순간마다 내가 영화를 하려는 이유를 다시금 상기시켜주었던 영화는 대부분 멜로 영화였다. 영화에 완전히 빠지게 만들었던 최초의 영화 <너는 내 운명>을 시작으로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포르노그래픽 어페어>, <타이타닉>, <캐롤>에 이르기까지, 멜로 영화는 나를 이루는 근간이자 삶의 동력이었다. 그러니 나는 다음과 같은 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엇보다 아름답고 이상적인 사랑을 원한다.’ 어쩌면 뭉클한 사랑 이야기를 보고 난 뒤의 감응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그간 멜로 영화를 외면해왔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결국, 영화란 무의식의 영역으로까지 나를 확장시켜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의식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삶의 진실과 생경한 감각과 어떤 것의 본질에 대해 사유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나, 그리고 나의 욕망, 더 나아가 사악함, 선함, 이중성, 어리석음, 이기심 등에 대해 깨닫게 된다. 과장하자면 영화란 나에게 나를 소개시켜 주는 일종의 소개팅 어플과도 같다. 그 만남을 통해 내면의 소통이 시작되고, 종국에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도 확립되는 것이다. 그렇게 삶이 달라진다. 요컨대 영화는 참으로 쓸 만한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