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스텔로 Aug 28. 2023

<콘크리트 유토피아>, 우화도 현실도 아닌


우화도 현실도 아닌



무엇보다 서늘하다. 인물은 차갑고 냉정하며 작중 지진으로부터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황궁 아파트는 참으로 고독하고 썰렁하다. 기후 이상으로 최악의 추위가 이어지는 상황 설정은 이러한 공기를 한층 더 무겁게 만든다. 얼핏 보기에 지진과 기상 이후를 통해 생존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며 냉기 가득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극단적 설정은 재난 영화의 시작으로서 온당 자연스럽고 정당해 보인다. 사실 그 자체로는 문제 될 게 전혀 없다. 그러나 이 우화적인 설정에 현실적인 요소가 틈입하는 순간 문제는 불거진다.


작중 민성과 명화 부부는 영화의 주제와 관련하여 완전한 대립항으로서 내내 충돌한다. 그중 명화는 비현실적으로 착하고 이타적인,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평면적인 인물이다. 민성은 상대적이긴 하지만 적어도 명화만큼 이타적이거나 감성적이진 않다. 이러한 설정은 이들이 현실에 존재한다기보다 어떤 개념이나 가치관을 대리적으로 이행하는 우화 속 인물로 비치게 한다. 그러니까 명화는 협력과 공생의 가치, 민성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개념을 설파하는 인위적 인물로 굳어지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나 한 편의 우화라는 사실을 우리는 편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외의 것들, 이를테면 현대 사회에서 가장 대두되는 현실적 문제인 주거와 부동산 문제를 극 안으로 끌고 들어오면서 혼선이 빚어진다. 이는 작중 배경으로 황궁 아파트를 정했을 때부터 전면화될 수밖에 없는 문제이지만, 영화는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때로는 직접적인 대사로, 혹은 인물의 사연을 소개하는 플래시백, 특히 광기를 드러내며 권력을 장악한 영탁의 얼룩진 사연을 공개함으로써 이 문제를 거듭 부각한다. 그렇게 우리는 현실과 우화라는 두 가지 세계를 동시에 흡수해야 하는 곤란한 사태에 처한다.


<기생충>이 훌륭한 블랙코미디가 될 수 있었던 건 영화가 양극화라는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것과 별개로 하나의 우화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우직하게 밀고 나아갔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기택네 가족이 억수를 맞으며 빗물에 잠긴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 정도만을 현실과 우화 사이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장면만큼은 온전히 현실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본다고 가정하더라도 작중 세계 전체가 해당 대목부터 우화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전반부는 코믹한 우화로, 후반부는 현실적인 드라마로 일종의 모드 체인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기생충>은 해당 대목이 등장하기 전부터 그 불길한 조짐을 거듭 예고하고 있기에 후반부 전개를 이질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다른 우화적인 영화들, 예컨대 <송곳니>, <더 랍스타>를 위시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나 최근에 개봉한 <슬픔의 삼각형> 같은 영화도 마찬가지다. 끝까지 우화로 밀어붙이거나, 우화와 현실을 정확히 나누어 찍는다.



우화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 없이 현실의 세계와 그것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은밀히 드러낼 때 비로소 완성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 대목에서 철저히 실패한다. 이는 위에도 기술했듯 인물 설정과 플래시백을 통해 확증되는데, 이로 인해 민성의 변화 과정이 모호하게 처리된다. 가령, 절대 선을 상징하는 우화적 인물 명화의 대척점에 있는 민성에게 한 가지 사연이 첨부된다. 차량에 깔린 한 여성을 구하지 못함과 동시에 그 여성을 구하려다 정작 본인이 목숨을 잃을 뻔한 과거의 안타까운 사연이 소개되면서 민성은 현실적인 갈등을 겪는 인물로 전환된다. 명화와 대척점에 선 또 한 명의 우화적 인물인 영탁도 마찬가지다. 그가 외부인들을 몰아내고 아파트 주민만의 왕국을 설립한 극단적 이유가 공개되면서 그 역시 현실적인 동기를 지닌 인물이 되어버린다. 반면, 그들의 환경이 되는 다른 아파트 주민들은 자신의 이익 혹은 가치관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오로지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내달리는 우화적 인물로 그려진다. 말하자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우화적 환경과 설정 속에서 철저히 우화적으로 움직여야 할 인물들이 걸핏하면 현실 세계에 접속하고 나서 다시 우화의 세계에 재접속하는 혼란스러운 양태를 띤다.


그런 연유로 민성이 영탁의 정체를 알게 돼 명화와 새로운 거처를 찾아 나서는 대목에서 민성에게 내적 변모가 일어난 것인지 모호해진다. 그가 우화적 인물이라면 외부인들에게 점령당하기 직전이며 애초부터 외부인이 대표였던 황궁 아파트 대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는 게 본인과 아내의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만약 그가 현실적 인물이라면 본인과 아내를 위해 외부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과거를 반성하고 이제라도 그 사악한 지옥도에서 벗어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 기술하고 있듯 민성의 우화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이중적 면모 탓에 그 어느 쪽으로도 무게추가 기울지 않으면서 이 변곡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진다. 이 모호함은 명화는 생존하고 민성은 사망하는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영원한 물음표로 남게 된다. 요컨대 민성에겐 해명의 기회가 부여되지 않는다.


만일 마지막 생존자가 명화가 아니라 민성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명화의 선한 가치관이 작동하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적어도 황궁 아파트에서 벌였던 자신의 악행이 최선의 방책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며 앞서 언급한 변곡점에서의 모호함은 완전히 상쇄되지 않았을까. 물론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본질적인 문제는 영화가 우화와 현실 사이의 애매한 포지션에 있다는 점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제임스 캐그니의 갱스터 연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